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 원규)-여름의 詩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려면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연화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토요산행이나,일요산행이나, 산에 오를 때는 마음가짐이 모름지기 이래야 할 터. 옛날, 지리산에 쓸데 없는 마음으로 올랐다가 산신이 노하여 생전 맞아보지도 못한 비를 맞고, 생고생을 한 기억을 되살리며, 비 오는 지리산에서 내려와 실상사에 들렀을 때, 넓고 푸른 들판에 눈이 베이고, 내 살아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네. 비 오는 저녁에.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 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원추리 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벌 받은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시라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모레알처럼 겸허하게 오시라
툭 하면 자살을 꿈꾸는 임아
반성하러 오시라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