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위의 구유는 성당 밖에 장식한 구유
아래의 구유는 성당 안 제대 앞의 구유이다.
그래도 뭐 그렇게 대단하게 치장한 구유에 속하지는 않는다.
시골 성당이라 나름 소박하게 장식했다.
올케가 보내준 대도시 성당의 구유 사진을 보고 너무 화려하다고 한 마디 했다.
화려한 구유에 성모님이 어떻게 예수님을 낳으셨겠나.
교회도 그렇고, 성당도 그렇고
성전이 화려하고 큰 것을 정작 예수님은 바라지 않으셨는데
요즘은 십자가는 하늘을 찌르고, 그 웅대하고 화려한 성전은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소박하고, 작은 성전에 만족하지 못하나.
그러면서 늘 신앙에 대해 떠들고 다니니 이 시대 나를 포함한 신심을 가진 자들이 한심할 지경이다.
콜로라도에 사는 친구가 다니는 성당에는 한국사람이 많다고 한다.
한국신부님이 계시니 자연적으로 한국사람이 많겠지.
친구는 십오년 전에 이 성당을 떠나 다른 성당에 다녔는데 이유는 성탄절 행사 때문이었다.
성탄 시기 전에는 대림절이라 회개하고, 참회하면서 예수탄생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성탄절 행사를 위해 화려한 의상과 소품들로 장기자랑을 준비하다보니
점점 더 성탄절의 의미는 퇴색하고 놀고 먹는 파티로 변질되었다.
성경이나 성모님의 발현, 여러 말씀에 대한 지식은 없고
그저 먹고 마시는 모임을 위해 신앙생활들을 하니 그 믿음이 좋을 리 없다.
올해는 친구의 남편이 몸이 많이 안 좋아 다시 그 성당에 나가게 된 친구가 구역장을 맡게 되었다.
성당의 분위기를 보고 결심을 한 친구는 성모님 발현, 예수님 탄생의 성극을 성탄절에 올렸다.
신부님의 칭찬과 다른 신자들의 놀라움을 자아내어 아마 이제부터 성당의 분위기가 달라질 거라고 한다.
친구의 믿음의 작은 밀알이 더 좋은 열매를 가져올 거라고 말해주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죽음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면
늘 겸손함을 잊어버리게 된다.
겸손함이 인생 최대의 화두이다.
그것에 따라 인생의 클래스가 달라진다.
나도 조금 더 높은 계단에 서 보고 싶다.
흉내를 내는 위선의 계단이 아닌
겸손과 우아함의 계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