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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철소설가 별세(한겨레신문 펌)

by 키미~ 2016. 9. 19.

 

원로 소설가 이호철씨가 18일 오후 별세했다. 향년 85. 고인은 그동안 뇌종양으로 투병해 왔다.

이호철씨의 문학 세계는 6·25 전쟁과 그로 인한 이산 체험을 중심으로 짜였다. 1932년 3월15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원산고등학교 3학년 때 인민군에 동원되었다가 포로가 되고 우연찮게 풀려난 뒤 1950년 12월 단신으로 월남했다. 부산에서 부두노동과 제면소 도제, 미군 기관 경비원 같은 일을 하며 소설 습작을 한 그는 1955~56년 잡지 <문학예술>에 단편 ‘탈향’과 ‘나상’(裸像)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하루아침에 부산 부둣가에 떨어진 이북 출신 네 청년을 주인공 삼은 ‘탈향’은 작가 자신의 체험에서 빚어진 작품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단편 ‘판문점’(1961)과 연작소설집 <남녘사람 북녁사람>(1996)은 분단과 통일이라는, 개인사에 기원을 둔 관심사가 작가 이호철의 필생의 화두였음을 알게 한다.

후기 소설집인 <이산타령 친족타령>(2001)에서도 분단과 통일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어지며, ‘이호철의 해외동포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소설집 <가는 세월과 흐르는 사람들>(2011)에서는 한반도 남쪽과 북쪽만이 아니라 연변을 비롯한 중국 동북3성과 러시아 등 해외 동포들을 향해 관심을 넓히기도 했다. 고국 땅을 떠나 타향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을 향한 동병상련의 정은 말년의 이호철이 주창했던 ‘한살림 통일론’으로 귀결됐다. 이념과 체제를 넘어 삶의 구체성과 인간 본질의 관점에서 분단과 통일 문제에 접근하자는 것. 2000년 평양에서 반세기 만에 누이동생과 재회하기도 한 그는 이듬해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론적으로 과거를 들추거나 따져서는 또 싸울 일밖에 없어요. 만나면 됩니다. 너무 당위 쪽으로만 가서는 곤란합니다. 통일이란 말 자체가 너무 무겁고 고압적인 말이 됐어요. 말에 얽매이지 말고, 형편껏 오르내리노라면 만나는 만큼 친해지고, 그러다 보면 통일 비슷한 상태가 되지 않겠어요?”

이호철 문학의 또 다른 축은 <소시민>과 <서울은 만원이다> 같은 장편으로 대표되는 세태와 풍속의 꼼꼼한 재현이다. 평론가 정호웅은 어느 글에서 <소시민>과 최인훈 소설 <광장>을 비교하면서 현실의 숨은 본질을 치밀하고 날카롭게 포착하는 점에서는 <광장>이 앞서지만 <소시민>은 현실의 구체적 세목을 훨씬 풍부하고 생동감 넘치게 담았다고 평한 바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상황의 구체적인 파악”이라는, 이 소설 속 등장인물의 말은 이호철의 소설관을 압축해서 담은 셈이다.

대학 강의와 번역 이외에 다른 직업은 지니지 않은 채 평생을 전업 작가로 활동한 이호철은 특히 1970~80년대에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도 헌신적으로 가담했다. 1971년 재야단체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 문단을 대표해 운영위원으로 참여한 그는 1974년에는 날조된 ‘문인 간첩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1978년에도 당시 옥에 갇혀 있던 시인 김지하의 석방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구류 처분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이른바 ‘위장 결혼식’ 시위에 참가했다가 다시 구류 처분을 받았다. 1980년에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두 달 동안 정보당국의 남산 지하실에 갇혀 있다가 육군본부 군사재판을 거쳐 6개월 뒤에 풀려나기도 했다. 1985~87년에는 현재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를 맡았으며 87년 6월항쟁 기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 민주화 시위 현장을 지켰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낸 고인은 동인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받았으며 독일에서 주는 프리드리히 실러 메달을 받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민자씨와 딸 윤정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02-2227-7580)에 차려졌으며, 장례는 4일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장지는 광주광역시에 있는 국립 5·18 민주묘지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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