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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신춘문예 작품 감상과 경향 - 유창섭

by 키미~ 2012. 2. 20.

 

1. 신춘문예 당선 詩를 통해 본 현대시의 경향
                                                  유창섭 시인.월간모던포엠 편집주간

1) 당선 詩 감상에 들어가며


신춘문예 작품의 당선작이 발표되는 새해 초에는 이번에는 어떤 작품들이 우리 시단詩壇에 등장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신춘문예에 등장하는 작품의 참신성이나 시적 성취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만, 우리 현대시의 변화하는 흐름을 담아내는 하나의 척도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끌게 된다.

물론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문단의 현실을 살펴볼 때, 과연 신춘문예 당선 작품들이 우리 현대시를 대표하는 흐름을 이끌어낼 만한 최선의 작품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이 처럼 한 자리에서 다양한 시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새로움으로 포장된 시적정서의 발현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은 때문이기도 하다.

몇몇 새로운 젊은 심사위원들의 입성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오랜 기간 동안 심사위원들의 면면이 변화되지 않고 장기집권(?)과도 같은 심사를 하게 되어 새롭고 다양한 심사위원들의 시적 경륜이 투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은 금년에도 마찬가지 현상을 가져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충분히 드러난 물증이나 근거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심사위원과 시창작 지도와의 관계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되는 것 같은 무언의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는 듯한 착각이나 그런 혐의를 가지게 하는 사회적 현실을 우리는 주의 깊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

창조문학 신문의 박인과 평론가는 “신춘문예 심사위원이 한국문학을 죽인다”(2012년 1월16일)는 제하題下 평론에서 “심사위원 등이 금전적인 부분과 인맥 등에 얽혀있다는 ‘뜬소문’과 함께 신춘문예의 심사에 대한 병폐를 짚어보고자 한다. ‘뜬소문’처럼, 신춘문예를 실시하는 신문사와 응모자의 사이에서 신춘문예 당선 조건으로 1,000만원을 가지고 오라고 한다거나 지방신문사에서는 500만원을 가지고 오라고 한다거나 하는 등의 일을 하는 중개인들이 있다면 정말 한심한 일일 것이고, 이러한 일이 정말 있어서 이러한 일에 관련된 심사위원들이 있다면 심사위원의 자격이 박탈되어야 한다.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은 한국문학의 종언을 선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글을 싣고 있다.

뿐만아니라, 이들과 시창작 과정이라는 지도를 담당하는 사람들 문하門下에서 사숙私塾한 제자들에게 주어진 시재詩材속에 시의 자유로움이 갇혀버리는 한계가 보이는 지점도 이 신춘문예의 현장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해묵은 시적 소재에서 새로운 시인을 꿈꾸는 이들에게 보다 자유롭고 상상력이 풍부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그런 시재詩材로부터 해방시켜줌이 어떨까?---이미 2011년에도 이런 문제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 바가 있다---하는 생각이 많다.

그런 척박하고도 제한된 환경에서도 신춘문예에 목을 매고 도전하는 젊은 시인들은 얼마나 많은가? 이들이 우리 현대시의 벽을 뛰어넘어 새롭게 도전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진 창조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그들을 제도적 시적詩的 속박에서 풀어주어 그들이 뿌리내릴 사회적 환경이 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한 관점에서 매년 연례행사처럼 발표되는 신춘문예 작품을 관심있게 들여다보게 된다.
그것은 기성 시인과 새로운 신인의 등장과의 사이에 시라는 공통적인 언어가 어떻게 교감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우리 현대시를 발전시키는데 얼마나 기여하게 될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신춘문예제도”라는 그 존재형식이 좋든 궂든 문단에 영향을 주면서 시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고 새로운 정서적 발현을 창조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신춘문예 작품에 기대를 걸고 그들의 시적 성취를 함께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금년에는 신춘문예 당선작을 발표한 신문사 중에서 18개의 신문사의 작품 26편을 중심으로 자료를 수집하였다. 이 자료 속에는 당선작품과 심사위원의 심사의견을 발췌하여 놓았다.
이 정도 수집된 자료라면 신춘문예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모든 신문의 작품을 수집한 것이 아니라도 충분히 그 경향과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점을 놓치지는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2) 신춘문예 당선 시에 대한 전반적 평가와 흐름


신춘문예 작품에는 어떤 일관된 경향이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니까 신춘문예작품 모집에 응모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시창작 방법이 아닌 좀 더 다른 형식의 창작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일반 문예지에 발표하는 자유로운 시 형식이 아닌 보다 독특한 시 형식에 맞추어 시를 창작하여야 한다는 말이 된다.

금년에 발표된 신문시의 신춘문예당선 시에 대하여는 각자가 다른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지만, 최근 몇 년만에 가장 흉작凶作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 같다.
이비 2011년에도 당선작품의 성취도가 떨어지는 빈곤함을 느꼈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도를 넘는 것 같다.
어떤 내로라하는 유명한 신문사의 당선작은 과연 이것도 시인가? 하는 수준의 시를 선해 놓고 심사평에서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을 읽으면서 적잖은 분노를 느껴야 헸다. 숙성되지도 않은 이미지에 기대어 상상력조자 연결되지 않는 문장으로 시의 위의威儀를 거스르고 있지 않은가 반성해야할 여지가 많다.
적어도 신춘문예 당선 시 작품이라면 일반 독자나, 시인들의 거는 기대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수준이 되어야 할 것인데, 금년에는 그나마 읽을 만한 시 몇 편을 제외하고는 매우 퇴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몇몇 새로운 젊은 심사위원들의 입성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오랜 기간 동안 심사위원들의 면면이 변화되지 않고 장기집권(?)---30년 이상 장기적으로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하고 있는 시인들도 있음---과도 같은 동일 선상에서 심사를 하게 되어, 새롭고 다양한 심사위원들의 시적 경륜이 투영되어 현대시의 발전에 기여할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현실은 금년에도 마찬가지 현상을 가져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신춘문예작품은 어떤 경향을 띄고 있는 것일까? 과연 그들은 얼마나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일까? 종전의 고정적인 소위 ‘신춘문예용’ 시창작 태도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신춘문예의 작품에 대한 내용과 형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심사위원들의 심사의견을 참조하여 살펴보는 것도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다소 빈정거림이 내비치는 것이지만,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권혁웅은 ‘미래파-새로운 시와 시인을 위하여’란 책에서 ‘신춘문예용 시(詩) 작법’을 논한다.

새해에 맞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을 것
하나의 대상을 선택하되, 두세 개의 비유를 중심으로 서술해 나갈 것
특정한 종교적 색채를 띠지 말 것
A4 용지 한 장 이내에 담을 분량일 것
분련시(分聯詩)의 경우, 3~5연 이내로 적을 것
생활에서 파생되는 감정이나 여행지에서 만나는 소회를 적을 것

그는 또 “약간의 은유(단순할수록 비유는 빛난다)와 문법적인 어사들을 생략한 시행(詩行·이게 축약이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결구(結句·이걸 수미상관이라고 한다), 여기에 그리움이나 만시지탄을 버무리면, 감상하기에 적당한 시 한 편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신춘문예 당선 '비법' 2006년9월16일[조선닷컴 박해현 ·문화부 차장대우]에서 인용)

위에서 말한 평론가 권혁웅 시인의 지적이 정형화된 신춘문예 창작 수법이라고 못을 박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경향만큼은 일반적이라고 말하여도 될 것 같다.

이번 신춘문예 당선 작품도 예외는 아님직하다.
신춘문예에 응모한 작품들에 대한 평가에서 조선일보 (심사위원; 문정희, 조정권)에서는 ‘유형화된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하고 있고, 한국일보(심사위원; 황지우, 정일권, 이광호)에서는 ‘신춘문예용의 작품이 주류’라는 지적을 하였으며, 세계일보(심사위원; 유종호, 신경림) 에서는 ‘유행을 타는 것인지 응모작들이 서로 비슷비슷한 점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다른 신문사의 심사위원들이 특별히 지적은 하지 않았으나 당선작품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 그러한 경향의 시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이번에 발표된 신춘문예 당선작품을 살펴보면 이미 3~4년전부터 일어난 “ 현대시의 서정성으로의 회귀“라는 현상에 치중되어 있다는 성향이 짙게 묻어난다.
과도한 난해성이나 애매성과도 같은 시적 실험에 몰입하여 우리 현대시를 난삽하게 만들어 혼란을 부추겨 왔다는 반성에서 당분간의 숨고르기 상태에 접어든 느낌이다.
시적 형식의 흐름도 과도한 산문적 경향에 비해 산문성이 가미된 형태로 시행이 길어지고, 산문성과 접목한 시 형식도 보인다.
일단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자유시의 형식으로의 회귀가 뚜렷해 보인다. 그리고 최근의 경향처럼 시행이 길어지는 유행(?)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시행이 길어지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길어지는 행을 정서적으로 갈무리하여 축약된 정서를 어떻게 펼쳐낼 것인가에 대한 고뇌는 없이 그저 유행에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다. 그것은 시인 자신이 왜 이 형식을 선택하여 시를 쓰게 되었는가에 대한 충분한 이유나, 시에 대한 형식에 대한 고뇌 끝에 선택한 형식이라는 상대적 가치관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문제에 다름이 아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시적 흐름은 당분간 이어질 것 같다는 예상을 하게 만든다.
시행이 길어지는 것과 맥을 같이하여 ‘갈수록 장황해지고 난삽하고, 모호해지는 오늘날의 시의 흐름’과 ‘언어의 함축미와 새롭게 삶을 성찰하고 투시하는 상상력의 결핍’을 지적한 조선일보의 심사위원들의 염려는 음미할만한 대목이 아닐까?
시의 형식에 대한 고뇌도 필요해 보인다. 꼭 잇대어 쓰는 형식의 빠른 호흡만으로 연을 나누지 않고 쓰게 되는 이유에 대한 고민도 없어 보인다. 그저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은 고만고만한 시행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의문이다.

내용 면에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성찰이나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분배의 의미와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의미에서 탄생하는 고통과 아우름에 관한 시인의 눈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시인 지망생들이 너무 현실을 도피하고 귀를 닫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시인이 시로 현실을 노래하는 것이 마치 좌익이고, 죄악이나 되는 것처럼 매도되어 온 정치 현실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개별적 이익을 얻기 위하여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온 언론의 편향성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 것 같아 실망감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먹고 살기 힘든 ‘서민들을 우민화’하고 깔아뭉개면서 그들의 의식이 깨어나지 않고 순치馴致되기를 기다리는 ‘힘 있는 자들’의 정치현실에 협력하는 길을 간다면 시인이 사회를 광정匡正해야 한다는 명제는 어디에 설 자리가 있는 것일까?

이미 우리와 함께 시를 쓰다가 “희망 버스”를 타고 약한 자들의 아픔에 동참했던, 법을 어겼다는 막연한(?) 이유로 사회정의를 소리치던, 한 시인(=송경동 시인)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처럼, 아니 일부러 그런 사실을 피해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시인들의 안이한 인식은 우리 사회를 무엇으로 정화catharsis시켜 줄 수 있을까?
그러한 편향적 인식은 99%인 우리가 1%의 지배층의 그늘에 기대어 기생하며 협력하는 시대의 공범이라는 지적을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시를 쓰는 시인은 사회적 문제에 등을 돌리고 일부러 눈을 감고 침묵하며, 마냥 마음 속 개인적 서정성에나 몰두하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언젠가 나치시대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나치가 반동분자를 잡아가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과 목자는 침묵하고 있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잡혀가고 마지막으로 그가 잡혀 가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그제야 ‘자신을 구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았다’는 내용이다.
우리 시대의 우화는 그렇지 않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사회 참여나 정치적 의견을 말하기 거북한 시대‘는 온전한 시대가 아니다. 많은 시대적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그것을 보고 침묵하는 시인들, 우리는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제 각 신문사가 발표한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작품과 심사위원들의 간단한 심사평을 빌췌하여 읽어 보기로 한다. (이하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당선 시’에서 발췌 ; 게재 순서는 작품이 수집된 순서임)


3.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의 관점


여러 신춘문예 작품을 심사한 심사위원들의 심사 의견은 이 시대의 “좋은 시”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 가에 대한 기대와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신춘문예를 지향하는 이 시대의 시인 지망생에게 하나의 시사점示唆點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시인들이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모든 시에 대한 정답이 되는 것도 아니며 시 창작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쓰는 사람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에 대한 가치기준과 견주어 새로운 자신의 시창작 태도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시적 흐름을 성찰하면서 과거의 시적 정서의 드러냄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 좋은 시가 될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흐름을 창조할 수 있는 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2~3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창조문학신문”에서 ‘용감하게’ 한국문학의 문제점을 이슈issue화 하여 관심을 끌고 있는 박인과 문학평론가가 지적한 신춘문예 작품 심사위원의 자질에 관한 시비是非---“신춘문예 심사위원이 한국문학을 죽인다”에서 시조 부문을 평가하면서 “시조를 작하는 자나 평하는 자나 똑 같이 기승전결의 흐름을 모르고 시조를 모르는 채 시조를 대하고 있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렇게 쓰고 또 선자는 이렇게 쓴 시를 잘 썼다고 평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어찌해서 이렇게 짧은 시조 하나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단 말인가. 슬프다. 한국문학의 주검을 본다. 특히 선자는 대한민국에서 노벨문학상을 바라보는 극히 추앙받는 시인이다.”라고 개탄한다.---는 별개의 문제로 두고 우선 지면에 나타난 실체적 내용을 정리하여 모아 보기로 한다.
그렇다면 각 신문의 신춘문예 작품 심사에 임하고 있는 심사위원들의 관점은 어디에 초점을 두었을까? 그 내용을 간추려 보기로 한다.

‘갈수록 장황해지고 난삽하고, 모호해지는 오늘날의 시의 흐름’과 ‘언어의 함축미와 새롭게 삶을 성찰하고 투시하는 상상력의 결핍’을 지적(조선일보)
‘삶의 구체성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묘사’하려는 노력과 ‘인간과 현실에서 삶의 남루함을 포착하는 섬뜩한 시적 투시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조선일보)은 부분적이지만, 수긍하여야 할 대목이다.

‘시 쓰는 것도 낡은 존재를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존재를 세우려는 몸짓’이며, ‘익숙함 속에서 익숙하지 않음을, 하찮은 것에서 하찮지 않음을 찾아내는 눈’을 가져야 하고, ‘남다른 상상력과 때 묻지 않은 자기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동아일보)

“독창적인 감수성과 화법이 잘 발견되지 않고, 언어에 대한 자의식 없이 정형화된 감정과 관념을 전달하는 데 그친 익숙”한 시들이 많고, “다채로운 이미지의 구축에 치중하는 작법이 어법 자체의 신선함을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아쉬움”(한국일보)이 있었다

“언어예술성을 담지한 체험의 진솔성이 기본”(전북도민일보)이라는 지적이 있었고,

“좋은 시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야 하는데 지나친 모호성이 해석의 다양한 물꼬를 막았다.”(문화일보)는 시적 정서에 대한 다면성을 지적한 내용도 있었다.

“현실인식이 뛰어나고 상상력과 시를 구성해 내는 능력”(강원일보)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보이고,

“하나의 단어가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전체를, 누구나 알 수 있는 단일한 사건으로 만들 때 그것은 시에 의해서고, 그것은 시인의 일이다. 말이 사건이 되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니다.”(서울신문)라는 언어의 함축적 의미를 잘 이해하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시의 본질적인 의미를 지적한 내용도 있었다.

“개성이 강한 작품이 많지 않다는 지적”(세계일보)은 자기만이 가지는 독창적 어법이나 시에 대한 태도가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관념이 형상화보다 앞선 점, 감성의 풍부성이 주목되나 상상력의 허점과 문장의 완결성 부분에 문제, 주제가 너무 상식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것, 관념이 너무 앞서고 설명적이라는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되었다.”(부산일보)라든가,

“한 편의 시가 유기적 구조를 갖추고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보았다. 작품의 처음과 끝이 조직화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난해한 시를 배제하지는 않았다.....“심사위원들이 곤란하다고 본 시는 비록 그것의 파편적 언어와 기발한 상상력이 부분적으로 절창을 낳더라도 맥락의 구조화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문제라고 보았다.(전북일보)

또는 “오늘날의 새로운 경향의 시는 상관관계가 멀게 느껴지는 이미지의 조합이나 산문적인 형식의 실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말의 상투적인 틀을 해체하고 인간의 감성을 새롭게 드러낸다고 하여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매일신문)이라는 지적은 시적 정서에 감동을 버무려 내는 데에 억지스러움이나 비합리성이 개재되어 혼란을 일으킨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많은 시편들에서 시적화자가 과장되어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징징거리고 있거나, 울고 있거나,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형상이 아닌 격정의 토로에 매달려 있었다.”(무등일보)는 현대시의 창작 경향을 지적한 내용도 있다.

“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과 '차별성(개성)'을 어떻게 둘 것인가를 놓고 매번 크게 고민한다. 심사방식도 타 매체들과는 달리, 매 작품마다 '문법· 어법· 표현의 적절성', '주제와 내용의 일관성', '감동· 느낌',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 '작품의 신선감· 독창성', '작가적 역량· 성장가능성' 등을 구체적 평가항목으로 설정”(한국문학방송)하였다는 신춘문예제도의 공정성이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서 그 부문별 평가요소를 세분화하여 작품의 전반적인 수준을 평가하려는 한국문학방송의 평가 방법은 참조할만 하다.

‘한껏 기교를 부리며 은유와 비유로 멋을 부린 시들‘이 아닌....“온몸으로 밀어올린 울림이 있는 시, 깊은 맛이 있는 좋은 시”(국제신문)라는 좋은 시에 대한 심사위원의 의견을 드러낸 것도 있으며,

“전반적으로 관념의 덩어리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결함을 지니고 있다. 파편적 이미지 다발의 연쇄로 서술의 골격이 약화된 모습”(경인일보)이라고 응모 시의 전반적 경향을 지적하고 있거나,

“요즘의 한국시가 지나치게 난삽하면서 그 길이도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 (경상일보)되었다는 지적도 음미 할만하다 하겠다.

이 외에도 “신춘문예는 참신성과 패기가 새로운 보편성을 창출해나가는 신인들의 미래 문법이 각축을 벌이는 축제의 장“(매일신문)이어야 한다든가,

한 신문사에 국한 되는 경향일지는 모르나 전반적으로 “실험정신이 살아 있는 시도, 삶을 치열하게 노래한 시도 드물었다. 이슈가 될 만한 시의 흐름도 눈에 띄지 않았고 전반적으로 시의 완성도도 낮았다.”(광주일보)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적인 심사위원들의 의견과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시에 대한 지극히 부분적인 면이 지적되었을 뿐, 전반적인 평가나 앞으로 한국 현대시가 지향해 나아가야할 방향성에 대한 넓은 시야를 종합적으로 드러내 준 내용은 보기 힘들었다.
이미 위에서 밝힌 여러 가지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한다면 아직도 2000년대 초반에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시 경향의 하나인 ‘갈수록 장황해지고 난삽하고, 모호해지는 오늘날의 시의 흐름’은 지속되면서 그 함축미나 난해성의 해독解讀 가능성에 관련하여 이미지들의 난삽하게 얽혀 그 이미지들의 상호 연결성이 독자에게 전달되지 못하여 시와 독자를 괴리시키고 있다는 현대시의 문제점은 시인들이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독창적인 감수성과 화법”의 문제에 대해서는 각 심사위원들의 표현 방법(한국일보, 세계일보, 매일신문 등)에 따라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은 “시인들 자신이 가지는 독창적인 이미지 발현“이 부족하고, ”시적 정서에 기대어 커다란 울림을 이끌어 내는 데에 그다지 성공적이 아니라는 점“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시는 누가 뭐라 해도 “감동”이 요체다. 그런데 “감동이 실종된 시”를 만나는 일이 많다.
그저 언어의 유희를 느끼게 하는, 표현의 기교에 머물러 감동이 숨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그것은 ‘낯설게 하기’ 또는 ‘새롭게 하기’라는 명분아래 언어의 표현 기교적 부분만 강조되어 온 풍조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그 결과 심사위원들의 대부분이 한 편의 시에서 표현의 기교가 던지는 이미지를 인용하여 심사평을 쓰는 것을 보면 마치 후광효과hallo effect에 의해서 시를 선選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을 보면 그 영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서적 이미지를 새롭게 확장시키기 위한 새로운 표현이나 움직임의 묘사가 보다 새롭고 아름답게 기술되는 현상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의 상투적인 틀을 해체하고 인간의 감성을 새롭게 드러낸다고 하여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매일신문)이라는 지적처럼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서의 보조적인 수단이어야 하고 주된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다.

특히 이와 같은 작품의 심사에서 분명한 작품의 차별성을 찾아내기 위한 장치로 '문법·어법·표현의 적절성', '주제와 내용의 일관성', '감동·느낌',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 '작품의 신선감·독창성', '작가적 역량·성장가능성' 등을 구체적 평가항목으로 설정”(한국문학방송)하였다는 점은 시적 정서를 계량화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할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 구성요소들을 정당하게 평가하여 주는 방법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좀 더 깊이 있게 연구하여 보다 구체적인 기준을 가진다면 더 좋겠지만, 이것이 어쩌면 좋은 시를 구분짓는 경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4. 신춘문예 작품에 대한 소회


이미 앞에서 신춘문예 작품에 대해 전반적인 내용을 부분적으로 언급한 적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개별적인 작품에 대한 내용과 경향을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한다.

2010년 1월 발표된 신춘문예 시부문 작품 분석(박인과 문학평론가)에서 “맞춤법에 맞지 않거나 문장의 오류 등이 많은 것은 신춘문예 당선작으로서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면서도 잘 알려져 있는 것이지만 2011년에도, 2012년에도 맞춤법이나 문법적 오류가 당선작품에서 발견되는 일은 심사위원들의 부주의나 꼼꼼한 시 읽기가 바탕이 되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번에도 중대한 오류라고 볼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시를 읽으면서 “걸림이 내재된 문법적 오류”가 발견되는 시가 3편이나 되었다.
예들들면 “조련사k“라는 시에서 ”그는 아침마다 동물원을 한 바퀴씩 도는 순방이 있다”는 문장을 살펴보면 주어에 연결되는 ‘순방이 있다’라는 어휘는 “순방을 한다‘거나 주어의 조사를 바꾸어 ”그에게는“으로 바꾸어 주어야 할 것 같고, ”머리 위로 왕관처럼 씌워진다“에서도 머리 위‘에’ 왕관처럼 씌워진다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의 고아원”이라는 시에서는 앞과 뒤의 문장을 연결해 읽게 되는 경우에 발생하는 “걸림”이 있는 경우로서 푹푹 빠지는 도랑을 가지고 싶었다. 빠지지 않는 발이 되고 싶었다“는 언술을 살펴보면 뒤에 이어지는 ‘발이 되고 싶었다’는 말은 ‘발을 가지고 싶었다’로 써야 그 주어와의 연결이 무난해 지지 않을까?
“귀화,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에서도 “허기로 눈밭에 시리도록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 이젠 지쳐”라는 표현은 “남기는 일이 지쳐”가 아니라 ‘일에 지쳐’라는 표현이 더욱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표현이 될 것이다.
물론 시인들이 국문법학자처럼 철저한 문법적 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며, 새롭게 이미지를 확장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문법 뛰어넘기”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시 속에서 부려지고 있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문법은 최소한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몇 년 전부터 지적된 것이면서도 아직도 우리 현대시의 흐름을 형성하는 데에 독특한 영향을 주는 신춘문예 작품들이 이번에는 “골목”에 갇혀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전부터 지적한 것이지만, “골목”이라는 소재가 여러 가지 다양한 시적 사념을 생성시키는 낯익은 소재라는 점은 인정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하필이면 신춘문예에 “골목”이라는 소재가 3편---나의 고아원(동아일보), 거미줄 동네(강원일보), 골목(한국문학방송)---이나 발견된다.
이 또한 문예창작 습작에서 제시된 소재를 이용한 습작과정에서 탄생한 여러 가지 이미지의 경합의 결과물인 것 같고, 혹여 심사위원들과의 내통(?)조차도 의심받을 수 있는 대목같아서 씁쓸한 입맛을 남긴다.

전반적으로 보아 시의 행이 길어지는 추세를 수용하는 현대시에서는 어쩌면 ‘당연히’ 시적 “긴장감이 약화”되는 것을 막을 수 없어 보인다. 또한 장황한 설명적 이미지들이 삽화처럼 끼어들어 표현을 새롭게 하기 위한 장치로서 언어의 불필요한 낭비나 함축성이 떨어지는 현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앞으로는 다른 상징적 내용이나 형식으로 보완하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여러 가지 사회 문화적, 정치적 환경의 제약을 받아 시인들의 자기검열이 이루어진 탓인지 몰라도 그러한 문명 비판적 시선이 왜소해졌다는 지적 또한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시 속에 투영된 이미지를 통해 인지하게 되는 의미의 시적 다면성을 가진 “조련사k"나 결혼을 준비하는 베트남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불고기, 물꼬기“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인상에 남는 우리 이웃의 아픔이나 사회적 풍자 등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도 전년(2011년)과 비슷하였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자신의 이익에는 철저하게 반응하지만, 타인 집단의 이익에는 끼어들기를 꺼려하는 피해의식이 투영된 결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각 당선작품의 심사평---아주 상세한 내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은 아니지만---을 발췌하여 붙여 놓았으므로 개별적인 감상을 반복하는 일은 줄이고, 다만 몇 몇 작품들에서 받은 특별한 감상을 부언하는 것으로 감상을 대신하고자 한다.

“월면 채굴기”(한국일보)에서는 “온 세상이 앓으면 아픈 게 아니고 / 매일 아프면 그것도 아픈 게 아니라고”하는 당연한 이야기가 새롭게 보이는 진솔함을 이끌어내는 힘이 상상력을강화시켜 주었다는 느낌을 준다.
“불고기, 물꼬기”(무등일보)에서는 한국의 국적을 얻기 휘해 한국어를 배우고 결혼을 위해 한국에 온 베트남 여인, 혹은 이주한 베트남 여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몸속에 체화되지 못한 언어와 동화되지 못하는 삶에 대한 정체성을 그려낸 특별함이 있었다.
“풍경 재봉사”(문화일보)는 그 섬세한 눈길과 얼마간의 상징적 이미지들이 표현의 기교를 통해 신선함을 높이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시적 긴장감이 없이 수월하게 읽히는 수필같은 느낌을 주었다.
“거미줄 동네”(강원일보)는 어김없이 등장한 신춘문예의 단골 숙소재熟素材라는 점이 익숙하고도 다양한 상상력을 상쇄시키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저무는, 집”(서울신문)은 이상李箱 시인의 오감도(제2호, 제3호)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말이 그려내는 풍경’을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시키고 있으나 그 주제가 주는 감동의 실체가 뚜렷하게 와 닿지 않는 면을 발견한다.
“노숙”(전북일보) 역시 단골 숙소재熟素材라는 익숙함이 ‘신문’이라는 목재의 원형질과 ‘신문기사‘의 원시적 욕망과의 새로운 ’다리놓기‘의 신선함을 반감시킨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물푸레 동면기”(매일신문)는 상투적인 말을 해체하고 새로운 이미지로 형상화한 ‘낯설게 하기 언어’의 성찬을 통해 감성적 견인력을 가진 표현이 많이 보인다.
“무릎의 아바타”외 4편(한국문학방송)이 당선된 작품들은 언어의 경제성이 살아있는 짧은 시행에서의 다양한 감동들이 느껴지는 점이 다른 신춘문예 작품들과 차별적으로 보였다.
“얼룩진 벽지”(국제신문)는 장마 때 비가 새는 모습을 그려내어 얼룩진 삶을 형상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으며, “우물이 있던 자리”(경인일보)는 어린 고교 3년생이 쓴 시로는 매우 풍부한 상상력을 보여주고는 있으나 ‘현상과 환몽의 의식세계를 넘나드는 환유적 상상력이 돋보인다“는 심사위원들의 지적은 가벼운 수사적 표현에 영향을 받은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노루귀가 피는 곳“(경상일보)은 어머니가 여기를 피워 올려 하늘 한켠에 뜸을 뜨고 나서 ‘노루귀’기 피어나고, 그 노루귀 꽃이 다시 대지에 생기를 불어넣는 모습으로 연결시킨 상상력이 재미있게 읽혔다.
어떻게 읽어도 좋은 시라고 하기 힘든 시를 당선작으로 선選한 곳도 보이지만, 당선된 시 작품보다는 심사위원들의 “현란絢爛한 수사修辭“가 더 돋보인 해가 아닌가 생각된다.

모두冒頭에서 언급했듯이 금년도의 신춘문예 작품 당선작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최근 몇 년 동안에 읽은 작품들에 비하여 그 수준이 현저하게 저하되어 왔음을 느끼게 한다.
신춘문예에 목을 매는 사람들의 숫자는 증가하고 있는데 그 수준이 저하되고 있다면 그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 한국 현대시의 흐름에 비상이 걸린 것은 아닐까?
“시적 발상이 새롭다기보다는 유형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곱씹어 볼만 하다.
또한 “시창작 지도”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창작 지도에 10여년간 같은 숙소재熟素材에 매달려 시인들의 상상력을 가두어온 탓은 아닐까? 혹여 심사위원들의 지나치게 오래된 관행에 타성이 붙어 새로운 시의 방향을 설정하기 어렵게 만들었거나, 현대시를 기성의 틀에 가두게 만든 잘못은 아니었을까?
많은 시간 반성과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지나치게 세분화된 이미지가 긴장감을 상쇄시키고 시적 정서를 왜소하게 만들었으며, 감동에 억지로 짜 맞추려는 불필요한 언어의 낭비가 시의 수준을 하락시킨 이유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롭다’는 말에 얽매어 지나치게 표현기교에만 치우쳐 감동의 깊이를 만들어내지 못한 면도 보인다. 각각의 세분화시킨 감동의 파편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능력이 떨어지고 있는 점도 바로 표현기교에 매달린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현대시의 흐름이 “감춤”의 시대에서 ”드러냄“의 시대로 이행되고 있다는 측면은 다시 되돌리기 어려운 하나의 흐름으로 보인다.


5. 신춘문예 시 감상을 마치며


이미 앞에서 종합적으로 금년도의 신춘문예 작품 당선작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최근 몇 년 동안에 읽은 작품들에 비하여 그 수준이 현저하게 저하되어 왔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춘문예에 목을 매는 사람들의 숫자는 증가하고 있는데 그 수준이 저하되고 있다면 그 문제는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 한국시에서 지금 필요로 하고 있는 시적 덕목德目은 무엇일까?
물론 이것은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러나 신춘문예 작품이라면 적어도 꼭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덕목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심사위원들이나 한국시의 흐름을 염려하는 시인들이라면 공통적으로 느끼게 될 몇 가지 필수적인 요건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낯설게 하기”라는 시적 기교에 이의를 다는 사람들은 적은 것 같다. 그것은 한 시대적 요구이며, 다양한 감동을 이끌어내는 요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새로운 시적 이미지의 발현發顯이라는 차원에서의 표현의 다양성, 다면성은 존중되어야 마땅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시의 본질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신춘문예 심사위원이 한국문학을 죽인다”(박인과 평론가)는 ‘과격한 표현’은 정말 과격한 표현일까?
시의 형식과 관련하여 약간의 불가피함을 인정하지만 시적 긴장감이 사라지는 현상은 되돌려져야 할 것 같다. 시적 긴장감이 전체의 골격을 이루어야 비로소 시적 특성이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의 전체적인 상징성과 연결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감동이 움직이고 깊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한 감동에 이르는 길은 독자가 시를 계속하여 읽게 하는 힘을 가진 시가 되어야 할 것이며, 사물과 인간의 의식 저편을 응시하는 따뜻한 시선, 냉철한 시선이 시 속에 투영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문법에 맞는 언어의 구사력이나. 불필요한 언어의 낭비를 줄이는 단단함, 시적 치밀함과 함축성에 대한 연마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로를 감싸 안는 인간적 연민이나 사회적 광정匡正의식이 살아 숨쉬는 시인의 사회가 되려면 시인들이 깨어있어야 하고, 시를 쓰는 능력 못지않게 시적변화를 이끌어내는 긍정적 힘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뒤에 숨을 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논하고 앞으로 나와 현재를 바라보며 보다 나은 미래를, 보다 아름다운 시의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대하며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필자도 포함되는 것이지만 시를 공부하고 그에 따른 변화를 꿈꾸는 시인들이 적은 것이 현실이다.
새로운 표현 기교에나 매달려 시를 쓰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 보다는 정서적 함축미를 생각하는 표현의 다양성과 시에 합당하는 형식---행가름, 연 나누기 등, 또는 산문시로 할 것인가 자유시로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감동에 이르는 새로운 창작에 대하여 공부하지 않고 사고思考하지 않고 고뇌苦惱하지 않고 어떻게 좋은 시가 탄생할 수 있겠는가?하는 물음을 먼저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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