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중앙대교수
연이은 가출로 인한 퇴학
검정고시 합격·대학 입학
불면증과 신경쇠약증에 휴학…
사법고시 2차시험 포기하면서
더 심해진 아버지의 광기를
나는 글을 쓰며 이해하려 애썼다


신춘문예의 계절이 왔다. 해마다 12월 초면 시인, 작가 지망생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작품을 최종 정리하여 투고한다. 크리스마스 전에 당선 통지를 받고 환호하는 자는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지만 아무 소식이 안 오면 우울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된다. 아, 올해도 안 되는구나. 신문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수많은 독자가 신문에 실린 당선작과 당선소감과 심사평을 읽는다. 신문사에서 문학작품을 공모하여 당선자가 문단에 나가는 것은 지구상에서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랬었다. 대학가 앞 주점들이 연말에 반짝경기를 본다. 한두 명 당선자들이 내는 축하주와 수많은 낙방거자(落榜擧子)들이 들이마시는 낙선주가, 특히 문예창작과가 있는 대학가 앞에서는 흥청망청 며칠 동안은 넘쳐나는 것이다. 당선상금을 받기도 전에 상당액을 미리 당겨 술 내고 밥 사느라고 거덜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당선자는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문예창작과에 재직하고 있고 시단 말석에 끼어 있다 보니 연초에는 사람들을 만나면 주로 신춘문예에 관해 대화를 나누게 된다. 예전에는 당선작들에 대해 품평을 주로 했었는데 근년에는 표절이나 중복투고로 인한 당선취소를 화제로 삼을 때가 종종 있다. 신춘문예 당선에 대한 갈망이 사행심이나 과욕을 불러일으킨 탓이다.

1993년이었을 것이다. 후배의 신춘문예 시상식 자리에 갔을 때,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다. 소설 당선작이 게재 이후에 표절작으로 판명되어 취소가 된 것을 그 신문 구독도 하지 않고 인터넷도 없는 때라 모르고 갔는데 사회자가 '당선작 없음'이라고 발표하고 유감을 표하는 것이었다. 이 소설에서 찔끔 저 소설에서 찔끔 교묘하게 짜깁기를 한 것이 나중에 발각되었다고 한다. 그날 시상식 자리 분위기가 시종 냉랭했었다고 기억된다. 여러 장르 중에서 시와 소설을 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선소감까지 함께 실린 작품에 대해 표절이라고 당선취소 사고(社告)가 나갔고, 그 직후에 이루어진 시상식이었으니 주최측 인사들의 표정이 밝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단 축제의 자리가 장례식장 분위기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1983년 크리스마스 직전, 중앙일보사 문화부라고 하며 전화를 걸어온 기자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승하 씨 되십니까?" "네 제가 이승하 맞습니다." "여기 중앙일보 문화부입니다. 신춘문예 당선 결정이 나 연락드립니다. 축하합니다." "아, 정말입니까? 고맙습니다." "당선소감과 사진이 필요한데 사진도 찍을 겸 저희 신문사로 한번 오시겠습니까?" "네 가야지요."

내 목소리는 분명히 떨리고 있었을 것이다. 말도 좀 더듬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말더듬이로 고생을 하고 있었으니까. 신문사 문화부 기자를 만나 대화를 나눌 때, "어, 당선작의 말더듬이 화법을 보고 놀랐는데 본인도 좀 그러시네요." 사실은 '좀' 그랬던 것이 아니라 꽤 심했었다. 「화가 뭉크와 함께」의 어조는 더도 덜도 아닌 나의 육성이었다.

   

내 생에 있어서 1975년부터 1979년까지의 5년은 하늘 아래 수많은 사람 가운데 형과 누이동생을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대화를 가져보지 않은 완벽한 침묵의 시간이었다. 내가 성장기를 보낸 곳은 경북 김천이었는데 형은 그나마 서울서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동생은 뒤늦게 온 사춘기를 앓느라 본인이 입을 봉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연이은 가출로 인한 퇴학, 검정고시 준비와 합격, 독서실과 시립도서관에서 보낸 긴 세월, 대학 입학 후 불면증을 겸한 신경쇠약증이 와 1년 동안 휴학도 했었다. 대구에서 살았던 때는 칠순 할머니와 대화가 될 리 없었고 춘천에서 살았던 때는 고모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글을 열심히 썼다. 실어증 환자처럼 입을 꾹 다물고 글을 쓰면서 세상을 읽었다.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한 아들이 사법고시 2차 시험장에 안 가면서 더 심해진 아버지의 광기를 나는 글을 쓰면서 이해하려고 애썼다. 만년실업자 아버지는 세상을 저주하고 있었지만 나는 사랑을 탐구하고 우리들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시, 시조, 소설, 희곡, 문학평론 다섯 개 장르에 걸쳐 1982년부터 꾸준히 투고하였다. 10년 세월 동안 신춘문예에 각 장르 모두 한 차례 이상 최종심에 올랐지만 당선소식을 들은 분야는 시와 소설이었다.

1989년 경향신문 소설 당선 소식을 전하는 기자에게는 더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다만, 시상식 날에는 목이 메어 몇 마디 못하고 말았다. "심사위원 선생님, 고맙습니다. 기대에 부응하고자 더 노력하겠습니다"란 말을 하고는 뒷말을 잇지 못하였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누이동생이 그만 알 수 없는 세상으로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수시로 집을 뛰쳐나가고 약을 먹고 소동을 벌이는 동안 말없이 아버지의 광기를 감당하던 누이는 시상식장에 올 수 없었다.

이번 연초에도 또 많은 사람들이 습작기를 마감하고 문인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랭보가 노래하였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에 있느냐고. 글쟁이는 글을 쓰면서 자신을 치유하는 존재이다. 이 땅의 문학을 밝힐 문인들이 혜성같이 등장하여 금성처럼 빛나기 바란다. 나는 시를 쓰면서 말더듬이를 조금씩 고쳐나갔고, 소설을 쓰면서 아버지를 용서하였다. 2001년, 『뼈아픈 별을 찾아서』라는 시집의 자서에 이렇게 썼다. "아버님, 제 시집 읽으시고 아주 환하게 웃으시리라 믿습니다. 이 시집을 아버님께 바칩니다."라고.

/이승하 중앙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