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홀쭉해졌다..장편·단편의 절반 이하 '짧은 소설' 늘어
백승찬 기자 입력 2017.08.24. 21:10[경향신문] ㆍ‘짧은 호흡’ 모바일세대 겨냥 문고판 시리즈 붐
올해 한국문학 최고의 화제작이라 할 수 있는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위 사진)>(민음사)은 원고지 500장 분량의 경장편 소설이다. 종래 장편소설이 1000~1200장 분량이었음을 고려하면 그 절반밖에 안되는 분량이지만,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의 일환으로 단행본 출간됐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는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 등 주목받는 작품을 내며 문학 시장에서 자리를 굳혔다.
소설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장편 대신 경장편이, 원고지 80~100장 분량의 단편 대신 30~50장의 손바닥 소설이 잇달아 출간되고 있다. 최근 출간된 <이해 없이 당분간(아래)>(걷는사람)은 25~40장 분량의 손바닥 소설들을 실었다. 백민석, 한창훈, 박솔뫼, 손보미 등 주목받는 작가들의 작품이 모였다. 80장 안팎의 단편을 모은 기존 소설집이라면 7~8편 들어갈 책에 22편의 손바닥 소설이 수록됐다.
걷는사람 출판사가 기획한 ‘짧아도 괜찮아’ 시리즈의 첫 책이다. 박찬세 편집장은 “일상의 절망을 벗어나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이야기를 써달라고 작가들에게 청탁했다”며 “마치 ‘맥주 샘플러’처럼 다양한 작가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해 또 다른 단행본 구매로 이어지도록 유도했다”고 말했다.
기존 문학 출판의 관행이라면 따로 출간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분량의 글들이 독립된 단행본으로 나오기도 한다. 경기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경기도에 거주하는 문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내고 있는 ‘경·기·문·학’ 시리즈는 작가들의 단편 2편 혹은 중편 1편 정도만 묶어 출간하고 있다. 권당 100쪽 안팎의 얇은 문고 판형인데다 가격도 4000원 정도로 저렴하다. 지금까지 김종광, 배수아, 김기우 등의 작품이 선보였다.
창비가 지난달 펴낸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는 책읽기에서 멀어진 청소년들을 우선 독자층으로 삼았다. 김중미, 박상기, 배미주 등 청소년 소설을 주로 써온 작가뿐 아니라 성석제, 공선옥, 정소연 등 성인 대상의 글을 써온 작가도 참여했다. 각 권마다 개성있는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들의 삽화도 수록됐다.
인문사회과학서적을 주로 취급했던 사계절 출판사 역시 ‘욜로욜로’라는 브랜드를 내걸고 청소년과 성인 독자를 동시에 겨냥한 소설들을 선보이고 있다. 파주 타이포그라피학교에서 일러스트와 디자인을 맡아 통일성 있으면서도 개성있는 북 디자인을 갖췄다.
소설이 짧아지는 이유는 무엇보다 요즘 독자들의 눈높이가 짧은 호흡의 모바일과 영상 매체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김영선 창비 편집자는 “긴 글을 읽은 경험이 부족한 세대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책이 많지 않다고 여겼다”며 “두꺼운 책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독자들을 위해 가능하면 얇은 종이를 쓰거나 적은 분량만 수록하는 방식으로 책을 만든다”고 말했다.
내용 면에서는 기존 장편이 주로 다뤘던 역사, 이데올로기, 시대에 얽힌 서사 대신, 일상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작품들이 많다. 박혜진 민음사 편집자는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는 좀 더 순발력 있게 사회적 이슈와 소통할 수 있는 작품들을 지향한다”고 설명했다. <82년생 김지영>이 여성차별 문제, <한국이 싫어서>가 ‘헬조선’의 문제를 다뤄 호응받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디지털 시대 독자의 주의력과 인내심이 과거에 비해 부족하다는 점은 확실하다”며 “소설 분량이 짧아지는 현상은 그런 독자들을 문학의 세계로 안내하려는 작업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과거 대하소설이나 장편소설이 담당했던 ‘시대의 벽화’를 그려내는 작업은 부족해진 것이 사실이다.
장 대표는 “해외에선 기존 장편보다 짧은 소설, 두 배로 늘어난 소설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며 “한국에서도 황석영의 <수인>(문학동네·전 2권)처럼 디지털로는 경험할 수 없는 서사를 제공하는 작품들이 더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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