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관객이 1억7300만명!..이거 실화? [한국영화 100년①]
‘1억7300만여명.’
2018년 1월1일부터 12월30일 현재까지 한국영화는 모두 1억9800여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 2012년 이후 한국영화는 7년 연속 1억 관객 시대의 영광을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위 수치는 그 7년 가운데 어느 한 해의 것일까.
아니다. 1969년의 수치다. 영화사가인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1969년 영화 관객수는 1961년 5800만여명보다 세 배가량 늘어났다.(한국영상자료원 정기간행물 ‘영화천국’ 중 ‘르네상스, 검열 그리고 이만희 영화’) 수치를 이끈 것은 한 해 200편이 넘는 작품을 선보인 한국영화였다. 하지만 한국영화가 늘 이렇듯 빛나는 성과만을 기록했던 건 아니다.
1919년 ‘의리적 구토’ 이후 100년. 2019년 한국영화는 흥망성쇠의 결코 짧지 않은 역사를 지나오며 이제 할리우드를 뛰어넘는, 전 세계 영화시장에서 몇 되지 않는 ‘자국영화’의 모범으로 세상에 비치고 있다. 식민과 해방, 전쟁과 분단, 독재에 맞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등 현대사의 숱한 굴곡 속에서 한국영화는 스토리로서도 수많은 관객과 함께했다. 그 자체가 극적이라 할 만하다. 여기 소개하는 ‘키워드’는 100년의 한국영화가 써 내려온 바로 그 이야기의 상징이다.
● 1919년∼1950년대: 첫 영화 ‘의리적 구토’
“김도산 일행의 연쇄극이라 함은 극은 여하히 무미건조할지라도 마(馬)를 타고 쫏치며 자동차로 경주하며 위험을 모(冒)하는 등의 사진으로 갈채를 득(得)코자 함이 확연하니 이는 곳 주객이 전도한 변태의 극이 안인가.”(동아일보 1920년 5월16일자)
1919년 10월27일 서울 단성사 무대에 오른 ‘의리적 구토’는 아직 생소했을지 모르지만, 역사는 연극과 영화를 결합한 ‘연쇄극’의 이름으로 선보인 ‘의리적 구토’를 한국의 자본(단성사 운영자 박승필의 투자금 5000 원)으로 한국 감독이 연출(김도산)한 ‘한국영화’의 출발점으로 쓴다. 1903년 서울 동대문의 한성전기회사 기계창고에서 ‘활동사진’이 관객을 처음 만난 뒤였다.
무성극영화의 시대에 나운규는 1926년 ‘아리랑’을 내놓았다. 기존의 범주를 뛰어넘어 서구영화의 스타일을 따라가면서도 식민 조선의 현실을 드러내며 관객의 정서를 어루만졌다.
하지만 1930년대 일제의 억압은 영화라고 비껴가지 않아서 ‘반도의 봄’ 등 친일영화가 등장했다. 또 영화는 해방 이후 좌우대립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이념의 도구로도 쓰이며 힘을 잃어갔다. 전쟁의 포화가 지나간 뒤 1955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이 흥행하면서 비로소 서서히 성장의 길로 들어섰다.
1950년대 말 한국영화는 새로운 감독들의 등장으로 활기를 되찾아갔다. 김기영, 유현목, 신상옥 감독은 1960년 4·19의 열린 공간 안에서 각기 시선과 스타일로 ‘오발탄’ ‘하녀’ ‘사랑방손님과 어머니’를 내놓았다.
특히 신상옥 감독은 1961년 본격적인 제작 시스템의 원조로 불리는 신필름을 세워 흐름을 주도했다. ‘성춘향’ ‘연산군’ 등 정통사극과 ‘상록수’ ‘벙어리 삼룡’ 등 문예물, ‘빨간 마후라’ 등 전쟁물…, 장르와 스토리를 넘나드는 왕성한 제작·연출 활동을 펼쳤다. 여기에 ‘돌아오지 않는 해병’ ‘만추’의 이만희, ‘갯마을’ ‘안개’의 김수용 감독 등도 대중성과 작품성을 두루 평가 받으며 당대 대표적인 연출자로 자리매김했다.
이들의 연출 아래 신성일, 엄앵란, 김지미, 최은희, 도금봉, 김진규, 신영균 등 별들은 충무로가 본격적인 ‘스타’의 시대로 들어섰음을 알렸다.
TV가 널리 보급됐다. 관객은 극장에 가지 않았다. 유신과 긴급조치, 혹독한 ‘검열’의 시대이기도 했다. 소재는 제한됐고, 제작사는 허가 없이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한국영화 대신 외화를 택한 관객에게 다가가려 ‘제작 3편에 외화 1편’이라는 외화수입 쿼터를 얻기 위해 형식적으로 이뤄진 영화 제작은 질적 저하를 가져왔다.
그래도 성취는 뚜렷했다. 이장호 감독은 1974년 ‘별들의 고향’(46만명), 김호선 감독은 1977년작 ‘겨울여자’(56만명·이상 서울 기준)로 흥행 기록을 새로 썼다. 이들은 한국적 멜로의 정서 속 전혀 다른 스타일로 다가섰다. ‘경아’(별들의 고향)와 ‘이화’(겨울여자) 혹은 ‘영자’(영자의 전성시대)로 상징되는 ‘호스티스’(술집 여종업원) 이야기의 시대가 시작됐다.
이들이 그려낸 당대 청춘의 감성은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청춘’(1975년)에서 또 달리 드러났다. 영화는 검열이 가로막은 창작의 아픔을 상징하는 무대로 남았다.
1960년대 배우들도 계속 활약했다. 1960 년대 중후반 남정임·문희·윤정희의 ‘여배우 트로이카’ 계보는 1970년대 유지인·장미희·정윤희로 이어졌다.
5월 광주로 참혹하게 문을 연 시대에 한국영화도 여전히 암흑기였다. 임권택 감독의 ‘짝코’와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 등이 새 기운을 불어넣는가 싶었지만 영광은 되찾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1982년 정진엽 감독의 ‘애마부인’을 시작으로, 검열의 가윗날이 유난히 무뎠던 ‘에로티시즘’의 시대는 두 편의 영화를 잇달아 상영하는 변두리 동시상영관에서 관음의 시선을 불러 모았다.
‘깊고 푸른 밤’(1986) 등으로 깊은 탐미적 시선을 드러낸 배창호 감독은 ‘코리안 뉴웨이브’의 맹아가 됐다. 이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1988년),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1988년) 등으로 꽃을 피웠다.
1988년 할리우드 배급사 UPI가 ‘위험한 정사’를 직접 배급하면서 한국영화계는 연간 의무상영일수를 지키려는 스크린 쿼터 수호 투쟁에 나섰다. 생존을 위한 싸움이 시작됐다. ‘만다라’(1981년) ‘티켓’(1986년) 등 ‘거장’ 임권택 감독의 든든한 힘과 안성기, 박중훈 등 배우들의 멈추지 않는 활약도 바탕이 됐다.
표현의 자유와 독립성은 창작의 근간이다. 1990년대 한국영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계기다. 당대를 관통하는 두 편의 한국영화를 꼽으라면 기획영화의 시초로 인정받는 ‘결혼이야기’와 한국영화를 산업화의 길로 이끈 ‘쉬리’이다.
1992년 김의석 감독의 ‘결혼이야기’를 기점으로 한국영화는 ‘기획’의 시대를 맞았다. 아이템을 개발해 시나리오를 완성, 이를 토대로 감독과 배우를 선정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 관객의 적극 소구에 부합하려는 본격적인 제작 시도였다.
이듬해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한국영화 최초 100만명을 기록하는 등 관객도 급증했다. 2000년 문화체육관광부 집계에 따르면 1995년부터 5년간 한국영화 관객은 연 평균 28% 증가했다.
비약적인 성장 아래 1999년 남북한 첩보전을 다룬 ‘쉬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출발을 알렸다. 삼성영상사업단이란 대기업 자본과 충무로 제작 노하우, 한국적 정서가 맞물려 탄생한 히트작이다. 배급사 기준 620만 관객을 동원, 한국영화를 산업의 틀에 안착시킨 계기가 됐다. CJ엔터테인먼트 등 대기업과 금융자본의 공세 속에 ‘토종자본’ 시네마서비스 등도 질적·양적 성장을 도왔다.
2000년에 한국영화 흥행 기록은 거의 매년 경신됐다. 2000년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가 582만명(배급사 집계)을 모았고, 상승세 속에 2001년 ‘엽기적인 그녀’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금요일 개봉’을 처음 시도해 흥행했다.
신진감독들의 등장과 도전적 시도가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동시에 마침내 1000만 관객 시대도 열렸다. 강우석 감독이 2003년 12월 내놓은 ‘실미도’가 최초였다. 이듬해 2월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도 1000만 관객을 넘어섰다.
한국영화가 해외에서 본격적으로 인정받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2000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처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고, 임 감독은 2002년 ‘취화선’으로 첫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3년 박찬욱 감독이 ‘올드보이’로 심사위원대상을, 2007년 ‘밀양’의 전도연이 첫 여우주연상을 칸에서 품에 안았다.
대기업 계열 배급라인이 더욱 확고해지면서 대작의 기획·제작도 속도를 냈다. 멀티플렉스 확산도 관객 동원을 이끈 기폭제였다. 이에 영화 상영 관행과 관람 문화도 바뀌었다. 하지만 대기업 배급사와 극장체인의 수직계열화 문제를 야기, ‘스크린 독과점’ 논란 등은 지금껏 해결되지 않는 영화계 숙제로 남았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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