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다방이 있는 마을
함명춘
한때는 아주 큰 산판일로 집집이 흥청거린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먼지와 거미줄만이 손님인 향수다방을 머리에 이고 차곡차곡 하루를 살아가는 향수슈퍼가 서 있는 마을
코흘리개 아이처럼 굴뚝들은 저녁이면 훌쩍훌쩍 연기를 흘리고
제일 오래된 우물도 첫돌 지난 아가의 푸른 눈처럼 시린 그곳은 하나같이 어리다
하루 네 번 지나는 정기열차 외엔 소유주가 불분명한 몇 량의 적막만이 운행하고
밭마다 병아리같이 모인 동네 아주매들이 흙보다는 끊이지 않는 웃음 속에 더 많은 씨앗을 뿌리는 곳
굳게 마음먹은 바람도 마을 언덕에 닿으면 풀어져 살구나무 가지를 두어 번밖에 흔들지 못하고
아픈 기억도 세상에 온 지 이틀밖에 안 된 산수유나무처럼 담장마다 소리 없는 미소를 톡톡 터뜨려놓는다
세월이 흘러도 철들지 않는 햇볕들이 하루 종일 뛰어놀다 가는 마을
아무리 큰 상처도 어린 바둑이와 같아서 어룽어룽 만져주면 이내 내 가슴에 와 안긴다
—《현대시》201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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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명춘 / 1966년 강원도 춘성군 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1991년 〈서울신문〉신춘문예에 시 '활엽수림' 당선으로 등단. 시집 『빛을 찾아 나선 나뭇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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