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세미
김 정희
늦은 여름 아침, 늙은 소처럼 마당을 어슬렁거리다
그 놈 물건처럼 축 늘어진 수세미를 보았는데
큼지막한 게 보기는 좋다만
개미가 바글대고, 거죽은 주글주글한 것이
꼭, 우리 망구 닮았구나.
내 심통 맞은 소리에 망구 볼따구 실룩이며 그 놈 두둑 따더니
햇살 먹어 늙은 망구 궁둥이만한 장독위에 푹 삭을 때까지 놔두라네.
아, 이 사람아, 그걸 어따 쓸려고
내 보기엔 한 근은 족히 보이지만 먹을 수도 없는데
망구 힐끔 내 아랫도릴 보더니
껍데기 삭고 나면 거미줄 같은 속으로
설거지를 멋지게 할 수 있다네.
멀쩡한 물건 가진 못생긴 놈들이 많은 세상에
못 생긴 물건 가지고 멋진 최후를 맞이하는
저 늘어진 수세미로 뒤숭숭하던 내 간밤의 잠 설거지를 해 볼까나
평상에 수세미 베고 하늘 마주 누우니
늙은 황소 내 꿈 밭에서 쟁기질 하다가
큰 물건 내게로 돌린 채 히죽 웃고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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