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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페소아(펌)

by 키미~ 2018. 10. 17.

120개 이름을 가진 시인 페소아, 그는 자유이자 위로다


[경향신문] ㆍ페소아 시집 번역한 김한민·해설 쓴 심보선 대담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

당신의 정체성은 몇 개인가? 가족관계나 직장에서의 관계 등을 따져봐도 어렵지 않게 열 손가락은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이 모든 정체성은 조화를 이루는가?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어떤 정체성은 부각되지만, 어떤 정체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때로 충돌하는 정체성들은 ‘나’를 피곤하고 지치게 만든다. ‘통합되고 일관된 나’ 같은 것이 있어야 할 것도 같다.

하지만 당신이 페소아를 만난다면,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많게는 120개의 이명(異名)으로 존재했던 시인, 본명으로 쓴 시보다 자신이 창조한 이명으로 쓴 시로 더 유명한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는 말한다.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매 순간 변해왔다.”

포르투갈의 시인 페소아는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1994년 그의 시집 한 권이 번역됐지만 절판됐다. 2014년 산문집 <불안의 서>가 출간된 데 이어 최근 페소아의 시집 3권이 동시에 번역돼 나왔다. 페소아의 가장 유명한 세 이명, 알베르투 카에이루와 리카르두 레이스, 알바루 드 캄푸스 등의 시를 모은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민음사)와 페소아 본명으로 발표한 시들을 모은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페소아를 이야기하면서 번역자 김한민(39)을 빼놓을 수 없다. 오로지 페소아를 공부하기 위해 포르투갈로 유학까지 간 그는 그림 작가이자, 해양환경단체 시셰퍼드의 활동가이기도 하다.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김한민이 페소아에게 끌린 건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집 추천사를 쓴 심보선 시인(48)은 사회학자이자 교수, 시인이다. 지난해 출간된 세 번째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에서 그는 시와 산문 등 다양한 형식의 글을 실었다. 볼프강 에젤만이 쓴 ‘당나귀문학론’도 실렸는데, 그는 실존 인물이 아니다. ‘페소아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1일 심 시인이 교수로 있는 경희사이버대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페소아의 시집을 번역한 김한민씨(오른쪽)와 해설을 쓴 심보선 시인이 지난 11일 경희사이버대학교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 페소아는 다양성이다

다양성에 누구에든 공감대 복합 자아 존재 가능성 제시

김한민(김) = 페소아는 너무나 다양해서 누구나 공감할 부분을 찾을 수 있다. 목가적 전원시인 카에이루부터 기술을 예찬한 모더니스트 캄푸스까지. 지금 읽어도 바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페소아의 이명은 인터넷 공간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다양한 자아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심보선(심) = 나는 누구 스타일이지? 카에이루인가 캄푸스인가? 생각은 캄푸스인데, 쓰는 스타일은 카에이루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와의 연결고리가 생겨나는 게 재미있다.

김 = 심보선 시인이 볼프강 에젤만이란 이명으로 ‘당나귀문학론’을 쓴 적이 있다.

심 = 페소아를 흉내낸 것이다. 그런데 실패했다. 내 스타일이 아닌 완전히 다른 스타일과 관점을 갖고 쓰는 게 쉽지 않더라.

■ 페소아는 자유, 위로다

‘내 스타일’의 검열 생길 때 ‘이렇게 해도 되네’ 북돋기도

김 = 일관성을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페소아를 통해 자유를 느끼는 것 같다. 그림 작가로서 ‘나만의 스타일’이 있어야 유리하다. 한 스타일로 계속 매력적인 그림을 그리면 시장에서 환영받지만 일관성 없이 그리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페소아를 알고 나서 응원받는 느낌이었다. 아, 이렇게 해도 괜찮구나.

심 = 자유롭게 쓰는 게 좋아서 작가가 되는 건데, 작가로서 커리어를 쌓아가다 보면 ‘나의 스타일’에 대한 검열이 생긴다. 때로는 완전히 새롭게 쓰고 싶은데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시를 너무 길게 쓴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페소아를 보고 ‘뭐야, 더 길게 써야지’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 시집은 ‘그러거나 말거나’의 심정으로 산문, 소설, 아무거나 다 넣었다. 페소아가 시 안에서 거침없이 질주하고 나아가는 모습이 큰 자극을 주는 것 같다.

■ 우리 모두는 조금씩 페소아

플러스 알파가 있는 그 우리는 다 조금씩 페소아다

김 = 우리 모두가 조금씩은 페소아다. 어디까지 밀어붙이고 긍정할 수 있냐는 문제인 것 같다. 실제 페소아가 다중인격장애였는지 연구한 사람도 있다.

심 = 자신의 정체성을 강박적으로 일관되게 유지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다. 친구들을 만나도 ‘나 교수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나도 어떤 자리에선 시인이란 정체성을 드러내면 어색해하고 불편해하기도 한다. 사회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역할을 부여하는데, ‘일관성’이란 다양한 역할을 적당히 배치하고 조절하라는 것이다. 페소아는 이 역할을 갖고 놀았다.

김 = 페소아에겐 다양한 정체성을 관리하는 규칙이 문학이었다. 페소아는 해리장애로 갈 수도 있었던 사람인데, 실제 자가진단도 했다. 페소아는 이명이 없었다면 못 살았을 것이다.

심 = 이명 가운데 페소아 스스로 제일 싫어한 게 자신이다. 서랍으로 치면 ‘기타등등’ 서랍이다. 제일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걸 그 서랍에 넣어둔 것 같다.

■ 페소아를 읽어야 하는 이유

심 = 페소아는 일반적인 방식으론 좋아할 수 없다. 어떤 페소아? 시? 산문? 이렇게 물어봐야 한다. 페소아에겐 플러스 알파가 있다. 문학이 원래 그런 것이다. 질문하게 만드는 존재다.

김 = 페소아가 내가 다른 사람일 수 있다,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는 ‘사건’이 되면 좋겠다. 두 사람에게 ‘어떤 페소아’가 좋냐고 물었다. 심 시인은 “산다면 카에이루처럼, 쓴다면 캄푸스처럼”이라고 답했다. 김 작가는 “제일 좋아하는 시는 ‘기차에서 내리며’”라고 답변을 갈음했다. 페소아가 가장 사랑했던 이명 알바루 드 캄푸스가 쓴 ‘기차에서 내리며’의 한 구절이다.

“삶이라 부르는 이 기차 속에서/ 우리 모두는 타인에게 우연이겠지,/ 그리고 마침내 내려야 할 때가 되면 우린 모두 서운해한다.// 인간적인 것은 모두 내 마음을 움직인다…내가 가진 건, 사상이나 강력에 대한 친밀감이 아니라/ 진정한 인류와의 넓은 유대감이기에…그리고 내 마음은 이 온 우주보다 조금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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