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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효환 시인, 김정수(펌)

by 키미~ 2018. 11. 3.

시인의 집 - 곡선들이 지탱하는 견고한 중심

김정수 시인
<159> 곽효환 시인 '너는'

오래전, 나를 찾아 길을 떠난 한 사내가 있다. 어느덧 '해 질 무렵'의 나이임을 인식한 그가 잠시 걷고 있던 길에서 벗어나 강가에서 다리쉼을 하고 있다. 그가 걸어온 '직선의 길'은 주변을 돌아볼 여력조차 없는, 정해진 목표를 향해 가야만 하는 쓸쓸하고도 고독한 인생길이다. 지도에도 없는 '직선의 길' 위에서 "격랑이 일고 폭풍이 지난 뒤의 폐허"를 경험한 그는 "뒤틀린 못난 것들이 버텨낸 것"이 세월만이 아닌 '나 자신'임을 깨닫고는 지그시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하고 반성한다.

1996년 세계일보와 2002년 '시평'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곽효환(1967~ )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너는'은 길 위에서 보낸 시간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삶을 반추한다. 시인은 연어처럼 강의 시원(始原)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어린 시절의 고향으로 시간여행을 떠나 '어린 나'를 만난다. "나로부터 세상을 향해 무수히 나아가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마당 약전略傳')오는 시간을 가지는 것.

그 여름밤도 남자 어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인들이 지키는 남쪽 지방 도시 변두리 개량 한옥
어둠이 밀고 온 저녁 바람이 선선히 들고 나면
외등 밝힌 널찍한 마당 한편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저녁상을 물린 할머니를 따라
평상에 자리 잡은 누이와 나 그리고
막둥아! 하면 한사코 고개를 가로젓던 코흘리개 동생은
옥수수와 감자 혹은 수박을 베어 물고
입가에 흐르는 단물을 연신 팔뚝으로 훔쳐냈다
안개 같은 어둠이 짙어질수록 할머니는
그날도 마작판에 갔는지 작은댁에 갔는지 모를
조부를 기다리며 파란 대문을 기웃거렸고
부엌과 평상을 오가는 어머니는 좀처럼 말이 없었다
어둠이 더 깊어지면 할머니는 두런두런
일 찾아 항구도시로 간 아버지 얘기를 했고
마당을 서성이던 어머니는 더 과묵해졌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달과 별과 호랑이, 고래와 바다를 두서없이 얘기하다
스러지듯 평상 위에 잠든 아이들을
할머니와 어머니는 하나씩 들쳐 업고
별빛 가득한 마당을 건너 그늘 깊은 방에 들었다

그런 밤이면 변소 옆 장독대 항아리 고인 물에
기다림에 지친 별똥별 하나 떨어져 웅숭깊게 자고 갔다
- '마당을 건너다' 전문

한여름 밤 마당을 통해 한 가족의 약사(略史)를 담고 있는 이 시는 시인이 왜 고단한 '직선의 길'을 쉼 없이 걸어야만 했는지를 보여준다. 지극히 서정적 풍경이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슬픈 상처는 시인으로서, 장남으로서 평생 안고 가야 하는 숙명이면서 책임감이다. "파란 대문을 기웃거"린 할머니와 "마당을 서성이던" 어머니의 심정을 다 헤아리기에는 어린 나이지만 나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묵묵히 '직선의 길'을 걸어온 시인의 몸과 마음에는 "풍경과 삶이 물결치는 세월의 무늬"('돌의 뼈')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멀리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요동遼東벌
가히 한번 울 만했다는 광원廣原을 뒤로 하고
요하遼河의 동쪽 환인 가는 길
가도 가도 진진초록 벌판에
더디게 더디게 오는 여름 저녁노을 구름 사이로 붉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키 큰 옥수수밭을 지나
작은 산들과 깊고 험준한 산맥들을 에워싼 어스름
들과 강과 하늘의 경계가 점점 흐려진다

칠흑의 차창 밖으로 소자하蘇子河 물소리만 들리고
강을 건넌 사내들이 지나간다
드넓은 들과 초원과 강과 산에 의지해
농경과 유목과 수렵으로
때론 이웃하고 때론 뒤섞여 힘 겨루며 살던
들풀 같은 삶들, 그 검은 그림자들이 흘러간다

숙신 읍루 부여 물길 말갈 여진이라 불린
오랫동안 북방 곳곳에 흩어진 야인들을 모아
요하를 건너 요서로 마침내 중원으로 나아간
첫 번째 만주족이 된 사람
더 먼 옛날 태흥안령을 넘고 송화강을 건너
남쪽 비류수 가에 첫 터를 잡고
사람을 모으고 씨앗을 뿌리고 물길을 다스린
알을 깨고 나온 활 잘 쏘는 부여 청년

작은 산들은 작은 산대로
멀리 큰 산은 큰 산대로 그늘 깊은 북방의 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산 밖으로 나가고 또 들어왔을는지
울고 웃고 뒤섞이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떠나고 남았을는지
그들을 만나러 가는 검푸른 길은 깊어 서늘하고
내 마음은 외롭고 쓸쓸하지만 모처럼 헌거롭다
- '환인桓仁 가는 길' 전문

일찍이 시인은 김동환·백석·이용악의 북방시편들을 통해 근대시에 있어서 북방공간의 의미와 북방의식을 정리해 우리 문학사와 문학공간의 확대를 이끌어낸 '북방'에 관한 본격적인 문학연구서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을 발간한 바 있다. 시인에게 평생의 화두 같은 북방은 학문과 시의 연장선상에 있다. 분단과 더불어 단절된 북방시를 잇는 동시에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본향의식이 '나'를 찾는 작업이라면 북방은 민족의 원류 '더 큰 나'를 찾는 작업이다. '환인桓仁 가는 길'에 마주친 "강을 건넌 사내들"이나 "요하를 건너 요서로 마침내 중원으로 나아간/ 첫 번째 만주족이 된 사람", "알을 깨고 나온 활 잘 쏘는 부여 청년"은 선조인 동시에 '더 큰 나'라 할 수 있다.

숲길도 물길도 끊어진 백두대간
둥치마다 진초록 이끼를 두른
늙은 나무들 아래에서
더는 갈 수 없는 혹은
길 이전의 길을 어림한다
검룡소 황지 뜬봉샘 용소는
강의 첫,
길의 첫,
숲의 첫,
너의 첫,
나의 첫은
어디서 나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바람만 무심히 들고 나는
어둡고 축축한 숲 묵정밭에
달맞이꽃 개망초꽃 어우러져
꽃그늘 그득한데
붉은 눈물 속에 피다 만 것들의 첫은
다 어디로 갔을까
- '첫' 전문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갔다
구불구불 흰 기둥이 떠받치는
오래된 집 앞에 멈추었다
옹이 박힌 굽고 흰 나무 기둥들이
백 년도 훨씬 더 넘게 떠받치고 있는
팔작지붕의 들보와 서까래
둥치부터 뒤틀린 못난 것들이 버텨낸 것이
어디 세월뿐이었을까

바람 불 때마다
큰일 있을 때마다
뿌리부터 이리저리 구부러진
보잘것없는 못난 나무들의 힘
곡선과 곡선이 지탱하는 견고한 중심을 본다
수없이 휩쓸고 지나간 눈과 비와 서리
그리고 흩어지고 굴곡진 삶들
그 중심을 수습한 대목장의 마음을 헤아린다
- '곡선의 힘' 전문

'직선의 길'을 걷던 시인이 잠시 곁길로 들어서는 곳은 강의 발원지와 절(터)다. 강의 발원지는 "나는 어디서 나고 어디로 흘러가는지"에 답을 얻기 위함이고, 절은 직선의 길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함이다. '첫'은 새롭지만 힘든 여정을 암시한다.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은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 위함이겠지만 "붉은 눈물 속에 피다 만 것들"을 떠올릴 뿐이다. 반면에 직선의 폭력성에 지친 시인이 절을 찾는 과정에서는 곡선이 가진 회복력을 깨닫게 되고, 절에 이르러서는 "곡선과 곡선이 지탱하는 견고한 중심"과 "흩어지고 굴곡진 삶들/ 그 중심을 수습한 대목장의 마음을 헤아린다". "어디에도 없으나 어디에나 있는/ 너라는 깊고 큰 구멍"('너는')을 마주한 시인은 "대목장의 마음" 같은 부처의 품안에서 비로소 "시원이면서 궁극인 너"(이하 '시인의 말'), 즉 "내 안의 타자"를 만난다. '너'이면서 '나'를 만나고, 나를 찾는 소중한 시간인 것.

지천명의 나이에 다시 길 위에 선 시인은 지금 "맑은 고요와 견고한 쓸쓸함이/ 고여 있"('달의 남쪽')는 '비움과 틈새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를 추스르며 "빠르게 질러가느라 놓친 것들/ 그래서 잃어버린 것들/ 찬찬이 새김질"하고 있다. "아슬아슬하게 혹은 아프게/ 넘나"든 사랑도 문득 그리워하고 있다.

흐르는 것이 어디 강뿐이겠냐마는
초록이 다 지기 전에
물길 따라 난 길이 문득 끊어진
강변 마을 어느 허술한 찻집에 들어
아직 고여 있는 것들
미처 보내지 못한 것들
함께 흘려보내야겠다
빠르게 질러가느라 놓친 것들
그래서 잃어버린 것들
찬찬이 새김질해봐야겠다
- '비움과 틈새의 시간' 부분

◇너는=곽효환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171쪽/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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