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임하면서 더 이상 학술서는 안 쓴다 작심하고 장서 9천권을 서울대도서관에 기증했다.
명예교수실에 나가면서 학생과 교수시절 못 읽었던 고전과 교양서를 빌려오느라 전보다 도서관에 더 자주 가게 된다.
그러다 작년 가을 중국에 가보니 펄 벅( Pearl S. Buck, 1892-1973) 연구가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마오쩌둥과 공산주의를 비판했다고 배척한 그녀를 이제 ‘중국인의 사이젠주(賽珍珠)’로 껴안는 것은
필경 대미용(對美用) 포석임을 느낄 수 있지만 대학들에 연구소가 서고 연구논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한국에는 펄 벅이라면 기껏 『대지』의 저자, 좀 더 알면 혼혈아의 대모 정도로 기억하는 잊힌 인물이 되었다.
그녀가 한국을 무대로 쓴 작품만도 4권이 되는데 대표적인 『살아있는 갈대 The Living Reed』 만이라도 읽은 사람은 극소수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1960년대 펄 벅을 전담하다시피 번역한 장왕록(1924-1994)교수가 서거하고
딸인 장영희(1952-2009) 교수마저 불의에 조서하니 누구도 뒤를 이을 학자가 없었다.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는 펄 벅을 미국 소설가, 그것도 대중소설가 정도로 치부하고 누구도 진지하게 연구해 보려하지 않았다.
1991년에 팬실베이니아대학의 피터 콘(Peter Conn) 교수가 쓴 『펄 벅 평전』(국내 번역서명)이 나온 것이 동서양의 ‘펄 벅 다시보기’를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마르코 폴로 이래 동서양을 꼭 40년씩 나눠 산 ‘동서양의 가교’(닉슨)로,
세계화(globalization)와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의 선구자로 부각되고 있다.
이런 국제적 추이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한국의 펄 벅’을 심각하게 말하려는 것이다.
작년 가을에 <한국펄벅연구회>를 조직하고 금년 9월에 미국에 가서 발표도 하고
‘펄벅문서’를 본격적으로 조사하고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1920년부터 중국 남경대학 교수로 강의할 때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자녀들을 가르쳤고,
여운형, 엄항섭, 김산(장지락)과도 알고 <한국은 독립해야한다>는 논설도 중국 신문에 썼다.
1934년부터 미국에서 ‘한국을 알자(Let’s know about Korea)’ 란 강연을 하고
유일한, 이승만, 강용흘 등과 독립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60년에 처음 방한하고 3년 후 소설로 본 한국근대사인 『살아있는 갈대』를 썼다.
스코필드박사를 민족독립운동의 제34인이라면 펄 벅은 제35인다. 두 분은 서로 가까웠다.
이 책의 첫마디는 “한국은 고상한 민족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이다”
(Korea is a gem of a country inhabited by a noble people)로 시작된다.
노벨문학상을 탄 문호, 세계 14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그녀가
가볍게 수사적으로 이런 말을 했을까?
인격과 국격이 무너진 오늘의 우리가 이런 말을 숙고하지 않으면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누구보다 학문을 하는 학자들이 자기 전공에 갇혀 이런 공동의 과제를 외면한다면 왜 학문을 하는 것인가?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한국과 한국인의 고상함을 파고들어 설명하고 제시해야 한다.
펄 벅은 도합 8번 방한해 1년가량 살았고, 부천의 <펄벅기념관>에 유품과 저서가 전시돼 있다.
한국의 학자라면 국문학, 영문학자만이 아니라 모두 이곳만은 봐야 한다.
거기서 한국인의 고상함을 진지하게 숙고해야 한다.
우선 이를 지적한 펄 벅이 서울과 부산의 명예시민증을 받고
최진주(崔珍珠)라는 한국명을 가졌다는 사실부터 알자.
독일계로 자이덴스트리커(Sydenstricker)라는 처녀명의 두음(頭音) ‘자이’를 ‘최’로 본인이 지은 것이다.
우리는 가까이 두고 지나쳐온 진주를 재발견해야 한다.
펄벅에 대한 정보가 이렇게 없다니..
부끄럽다.
그저 '대지'를 쓴 작가 정도로 알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최진주를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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