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unflower
  • sunflower

저녁 만찬을 위한 현악 4중주, 양승준

by 키미~ 2011. 1. 7.

저녁 만찬을 위한 현악 4중주/양승준

 

                                                

1. 퇴근 후 집에서

 

그 립스틱만큼이나 붉은

두 아이의 사랑을 받고

아내는 한동안 감격해 했지만

나는 아내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밖에선

마부의 채찍같은

11월의 늦은 비가 내리는데

그저 난

깔깔한 담배 연기나 불어넣으며

강 건너 고층 아파트 단지의

오색 등불만 바라볼 뿐이었다

좀더 따스한 불빛을 찾아

세상을 헤매이다 가는 것이

우리들 인생이라면

내가 찾는 불빛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2. 황제 갈비집에서

 

여기선 우리도

황제가 될 수 있을거야

오늘은 애들 좋아하는

콜라도 가져오라 하고

소주도 한 병 시킨 다음

나는 근엄한 황제가 되고

당신은 눈부신 황후가 되어

몇번이라도 술잔을 부딪쳐

이글이글 우리네 사랑을

돼지갈비같이 빨갛게 익히는 거야

뜨거운 숯불이

우리의 손등을 덮히고

빈 가슴까지 덥힐 때쯤이면

아이들의 즐거워하는 표정과

옷깃 구석구석 풀물처럼 배인

향긋한 돼지갈비 냄새를

한아름 안고

또다시 황제의 꿈을 키우며

힘차게 갈비집을 나서는 거야

 

3. 다시 집에서, 케익을 자르며

 

작은 촛불도 하나 둘 모이면

이처럼 밝은 빛을 낼 수 있는 거란다

얘들아, 자신을 불태우는 아픔 뒤에는

누군가 그 밝은 세상을

고운 눈물로 맞이하게 되리니

너희는 더도 말고

이 촛불만큼 만한 사람이 되거라

 

4. 밤, 아내와 둘이서

 

내일도엄마아빠

겨론기녀밀이엇스면조캣다

는 딸아이의 서툰 일기를 읽고

다시금 울먹이는 아내를 위하여

나는 첫날밤 그때의

설레이던 순간을 떠올리며

쑥스런 몸짓으로 다가가

살며시 입을 맞춰 주었다

지금쯤 두 아이도

따스한 불빛 나라

끝없는 하늘을 여행하리라

 

제 2회원주문학상 수상작 (1996년) : 양승준  시    <저녁만찬을 위한 현악 4중주> 외 9편

 

[약 력]

- <시와 시학> 등단 (1992)

- 저서 : <한국 현대시 400선-감상과 해설 상, 하> 외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안도현(퍼옴)  (0) 2011.02.15
포옹, 정호승  (0) 2011.01.10
오랫동안 버려둔 자신을 위해서  (0) 2011.01.02
아다지오 칸타빌레, 나호열  (0) 2010.12.13
小雪 2   (0) 2010.11.2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