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섬
월급 전날까지 지갑에 돈 이만 원만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아내에게 나는 그 잘난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따뜻한 시 한 줄 써 주지 못하고 소리 없이 이십 년을 살아왔네 잘게 반짝이는 밥풀 진주 하나 손마디에 묶어 주지 못하였네 그러나 아내는 알고 있으리 저 어두운 바다에 떠 있는 둥근 섬에는 작은 소라게의 야무진 꿈이 술렁이고 있음을 무성한 달빛 껴안으며 모시조개의 사랑이 움트고 있음을
십수 년 셋방을 전전하던 이력을 싸 들고 단계동 네거리 근처 거센 물살 헤치며 당당하게 닻을 내렸지 무시로 날아드는 이웃들의 날선 얼굴을 향해 한 줄기 미소를 날려 보내곤 아내는 흔들리지 않았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지 융자받고 전세 내어 지은 건물 한 귀퉁이에 살면서도 아이들이 주인 눈치 안 보는 게 어디냐고 모두들 무럭무럭 자라 제 발로 학교에 다니는 우리 만한 부자 세상에 어디 있냐고 어깨에 힘주고 있는 아내여 가슴으로 싱싱한 갈매기의 울음소리 콸콸 봇물처럼 지나가는구나
중앙시장 저잣거리의 파장 무렵 풀이 죽은 애호박 몇 덩이가 천근의 무게로 남아 있던 어느 시골 할머니 좌판 앞에서 차곡차곡 모아 가지고 간 비닐봉지들을 건네주며 눈물 글썽이며 앉았던 당신에게 나는 아직도 부끄러워 할말이 없는데
새벽녘 출항했던 아이들도 휘파람 날리며 돌아와 귀항의 깃발을 내걸고 잔잔한 물결이 우리들의 섬을 둥글게 감고 흐르는 밤 오늘도 육중한 부업용 재봉틀 앞에 앉아 힘겹게 페달을 밟는 그대의 어깨 너머 눈여겨보아 둔 백조좌의 작은 별 하나 빙긋이 웃으며 은하수를 건너고 있다.
김종호(2010, 시안, 둥근 섬)
제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 한 수 올리면서 새해를 맞이할까 합니다. 가난한 시인들은 늘 아내에게 미안하고, 방황하고 흔들리다 다시 詩로 돌아오는 이 시대의 남아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늘 지나간 시절은 안타깝고, 곁에 있는 시간에겐 무심한 오랫동안 내버려 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새해 정겹게 시작해 볼까요?
치악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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