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 (외 2편)
문태준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 움큼, 한 움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강을 따라갔다 돌아왔다
혼(魂)이 오늘은 유빙(流氷)처럼 떠가네
살차게 뒤척이는 기다란 강을 따라갔다 돌아왔다
이곳에서의 일상은 강을 따라갔다 돌아오는 일
꿈속 마당에 큰 꽃나무가 붉더니 꽃나무는 사라지고 꿈은 벗어놓은 흐물흐물한 식물이 되었다
초생(草生)을 보여주더니 마른 풀과 살얼음의 주저앉은 둥근 자리를 보여주었다
가볍고 상쾌한 유모차가 앞서 가더니 절룩이고 초라한 거지가 뒤따라 왔다
햇곡식 같은 새의 노래가 가슴속에 있더니 텅 빈 곡식 창고 같은 둥지를 내 머리 위에 이게 되었다
여동생을 잃고 차례로 아이를 잃고
그 구체적인 나의 세계의, 슬프고 외롭고 또 애처로운 맨몸에 상복(喪服)을 입혀주었다
누가 있을까, 눈시울이 벌겋게 익도록 울고만 있는 여인으로 태어나지 않는 이
누가 있을까, 삶의 흐름이 구부러지고 갈라지는 것을 보지 않은 이
강을 따라갔다 돌아왔다
강을 따라갔다 돌아와 강과 헤어지는 나를 바라보았다
돌담을 둘렀으나 유량과 흐름을 지닌 집으로 돌아왔다
돌담을 둘렀으나 유량과 흐름을 지닌 무덤으로 돌아왔다
근심의 체험
은밀한 시간에
근심은 여러 개 가운데 한 개의 근심을 끄집어내 들고
나와 정면으로 마주앉네
그것은 비곗덩어리처럼 물컹물컹하고
긴 뱀처럼 징그럽고, 처음과 끝이 따로 움직이고
큰 뿌리처럼 나의 신경계를 장악하네
근심은 애초에 어머니의 것이었으나
마흔해 전 나의 울음과 함께 물려받아
어느덧 굳은살이 군데군데 생긴 나의 살갗처럼 굴더니
아무도 없는 검은 밤에는
오, 나를 입네, 조용히
근심을 버리는 방법은 새로운 근심을 찾는 것
빗방울, 흙, 바람, 잎사귀, 눈보라, 수건, 귀신도 어쩌질 못하네
—시집『먼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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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고려대 국문과와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處暑」외 9편 당선.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맨발』『가재미』『그늘의 발달』『먼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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