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예술원은 유종호와 김윤식을 제명시켜라
——표절이 종식되는 그날을 위하여
반경환
나는 한때 대전시티즌의 열광적인 팬이었고, 지난 몇 년 동안은 대전시티즌의 축구경기를 관전하는 것을 크나큰 낙으로 삼은 바가 있었다. 대전시티즌의 축구 선수들은 대부분이 돈 많은 유명 구단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거나, 아예 그 구단들로부터 어떠한 입단 제의도 없었던 선수들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무명 선수들의 투혼에 무척이나 감동을 받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하 10여 도가 넘는 강추위와 섭씨 34~5도를 오르내리는 한여름의 더위 속은 물론, 사나운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 속에서도 나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전시티즌의 홈경기를 관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대전시티즌의 열렬한 팬으로서 대전시티즌의 주식을 청약한 바도 있었고, 나의 대전시티즌에 대한 사랑은 이미 승패를 떠나 있었다. 대부분이 지는 경기를 보면서도, 우리 대전시티즌의 선수들이 더욱더 큰 선수로 자라나기만을 기도하고, 또 기도했었다. 아직도 깡통주나 다름이 없는 대전시티즌의 주식을 갖고는 있지만, 내가 축구에 대한 사랑을 모조리 거두어버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 유명한 승부조작의 사건 때문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반전까지는 거의 대등한 경기를 펼치다가도 후반전만 되면 연속적으로 4골이나 5골을 먹는 장면을 보면서, 대전시티즌의 수비수들을 무척이나 욕을 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승부조작의 결과라는 사실은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그러나, TV 뉴스를 통해서 내가 몹시도 분개했던 그 장면들을 다시 보면서, 나는 천지개벽이나 다름없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결과,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연간회원권을 모조리 찢어버렸고, 어느덧 축구는 나의 관심밖의 스포츠가 되고 말았다. 한때는 야구의 관중을 위협했던 축구가 그 승부조작 사건으로 매우 위축된 것을 보면, 그 축구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은 나 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몇몇의 선수들은 대한민국의 법률에 따라서 구속되었고, 최성국, 김동현 등의 축구 스타들도 형사처벌을 받았거나 영구제명되는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몇몇의 선수들은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고, 어떤 선수는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들은 대한민국의 법치 아래 있었고, 또한 축구협회의 법률에 따라서 게임의 법칙을 준수할 수가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법질서가 문란하고, 게임의 룰이 지켜지지 않으면 어떤 운동도 그 운동으로 존속할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그러나, 이 축구협회만도 못한 단체가 대한민국의 학계와 대한민국의 문단이라는 사실을 우리 한국인들은 아직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의 학계와 대한민국의 문단은 이미 썩을대로 썩어서 어떠한 자정 능력도 상실해버린 지가 오래되었다. 저작권을 통해서 돈과 명예와 권력을 쌓아나가야 할 장본인들이 타인의 창작품을 너무나도 뻔뻔스럽고 파렴치하게 도둑질을 해가고 있는 것이다. 표절은 친고죄이며, 그 피해자가 신고를 하지 않으면 어떠한 처별도 받지 않게 되어 있고, 대한민국은 대단히 자랑스럽게도 아직까지 표절을 한 학자나 작가가 형사처벌(법적 구속)을 받은 선례가 없다. 소위 우리 학자들과 우리 문인들은 치외법권지역의 성자이며, 절대적인 강자들이다. 대부분이 영구제명----선수 자격을 박탈당한----을 당한 우리의 축구선수들이 연봉 2000만원 정도의 선수이거나 사병의 봉급을 받는 상무대 소속의 군인들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다면, 우리 학자들과 우리 작가들은 영원히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사형대의 제물들로 사라진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 학자들과 우리 작가들(유명작가들)은 대부분이 고액 연봉을 받고, 또 거기다가 수천 만원씩의 연구비와 창작지원금의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너무나도 뻔뻔스럽고 파렴치하게도 제자들의 논문을 가로채가거나 타인의 창작품을 표절해 댄다. 이중 삼중으로 연구비를 받고 논문을 중복게재하거나, 황우석 교수의 사건처럼 논문을 조작해대는 것도 너무나도 흔하고 흔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승부조작의 축구선수들보다도 더욱더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범죄인들이 대한민국의 예술원회원이 되고, 동인문학상 종신심사위원이라는 사실을 우리 한국인들은 도대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모든 지구촌의 인사들에게 대한민국은 표절의 왕국이니, 게으르고 또 게으른 모든 학생들은 대한민국으로 유학을 오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세상에,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그처럼 소중하고 중요한 세월을, 오직 학교에서 학원으로, 그 주입식 교육으로 몰아넣는----밥 먹고 잠자는 시간만을 빼놓고---- 나라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 한국인들의 미래의 백만 두뇌를 입시지옥으로 몰아넣고, 너무나도 마음에도 없는 독창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우리 학자들의 인면수심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 것일까? 일년내내 박사학위논문의 표절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도, 대한민국의 교육부와 대학교수협회는 전혀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사태를 우리 축구선수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표절은 학문과 예술의 승부 조작이며, 대한민국의 영혼과 정신을 갉아먹는 중대한 범죄행위이다. 문화선진국에서는 어떠한 표절도 용납하지 않으며, 만일, 어느 누가 표절을 했다면, 그에게는 영원히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법치국가이며, 문화선진국의 근본질서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예술원은 유종호와 김윤식을 하루바삐 예술원회원에서 제명하기를 바란다. 조선일보사는 동인문학상 종신심사위원인 유종호와 이문열----유종호와 이문열은 사제의 관계와도 같다. 참으로 스승과 제자가 대사기꾼으로서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훌륭하게 성장을 했다. 이것은 분명히 대한민국의 문화적 사건이며, 단군 이래의 최대의 경사라고 할 수가 있다----을 하루바삐 제명하기를 바란다. 이것만이 우리 학계와 우리 문단의 범죄인들을 처벌하고, 우리 대한민국을 법치국가로 올바르게 세우는 것이다.
만일, 유종호와 이문열을 처벌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문화선진국은 커녕, 영원한 불량국가(문화후진국)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이미 앞에서 인간의 지혜는 사기치는 기술이라고 선언한 바가 있는데, 그러나 그 지혜가 곧바로 ‘범죄 행위’로 단죄되어야만 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가령, 예컨대 알렉산더 대왕의 문화제국의 건설, 부처의 극락세계, 예수의 이상적인 천국, 나폴레옹의 유럽 연방의 건설, 그리고 리쿠르고스의 스파르타의 영원한 제국이 그들의 지혜의 산물이고, 그들은 그 목표를 위해서 수많은 이민족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개같이 학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류가 보다 우월한 종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면,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들의 지혜는 이 세상의 문명과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종의 건강’에 기여를 하게 된다. 따라서 이때의 지혜는 ‘고등사기술’이며, 그것은 학교라는 대 교육제도에 의해서 무한히 학습되고, 연구- 개발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것이다. 그 지혜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칸트, 헤겔, 니체, 쇼펜하우어, 뉴턴, 아인시타인의 이론적 성과처럼, 우리가 그 지적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더라도 어느 누가 훔쳐갈 수도 없고, 또 근본적으로 복제가 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의 이론과 사상의 정립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 하기는 커녕, ‘근친상간의 추태’를 ‘우리 한국인들의 미덕’으로 끌어올리고, 서구의 제일급의 지식인들의 이론적-- 사상적 성과를 베껴먹기에 여념이 없다. 표절 행위란 타인들의 연구 성과를 가로채 가는 더럽고 추악한 범죄 행위이며, 모든 저자들의 창작 의욕을 떨어뜨리는 지식인 사회의 암적인 종양----대 사기꾼들과도 같은 암적인 종양----들이다. ‘한국 국문학의 대부’, ‘한국 영문학의 선구자’, ‘불세출의 대형비평가’, ‘우리 시대의 현자’, ‘한국 인문학의 거장’ 등, 이 세상에서 더 이상의 화려한 수사와 상찬의 말들이 필요 없을 것 같은 김현, 김윤식, 유종호, 백낙청, 김우창 등이 모두가 다같이 글 도둑질의 대가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글 도둑질의 대가’라는 훈장을 수여하고, 학문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김현, 김윤식, 유종호, 백낙청, 김우창 중, 나는 그 중에서도 김윤식과 유종호의 대 사기꾼적인 면모와 그 파렴치한 범죄 행위의 전모를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김윤식은 그의 ?한국 근대 소설사 연구?에서,
첫 단계는 서양의 중세적 사고에서 인간 발견에 이른 방법론. 반 덴 베르크의 견해에 기대면, 서양에서 처음으로 풍경이 풍경으로 그려진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이다. 거기에는 풍경으로부터 소외당한 최초의 인간과, 인간적인 것에서 소외당한 최초의 풍경이 있다. 그 풍경이 인간적인 것에서 독립되어 독자적 세계, 이른바 풍경의 세계를 성취한 것, 그것이 근대성이고, 풍경에서 독립된 인간이 인물화의 세계를 이룩한 것, 그것이 근대성이다. 그러기에 ‘모나리자’라는 인물의 미소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를 물어서는 안 된다. 거기에서 이른바 ‘내면성’의 표현을 보아서는 안 된다. 사정은 그 정반대이다. ‘모나리자’에는 개념으로서의 얼굴이 아니고 맨 얼굴이 비로소 나타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맨 얼굴은 ‘의미하는 것’(시니피에)으로서의 내면적인 무엇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 ‘내면’이 거기에 표현된 것이 아니고 돌연 노출된 맨 얼굴이 ‘내면’을 의미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뒤집힘은 풍경이 현상에서 해방된 ‘순수한 풍경’으로서 존재한 것과 동시이자 동일한 것이다. T. S. 엘리어트가 단테의 상상력이 시각적인 성질의 것이라고 주장한 것에서보듯, 중세적인 세계에 산 단테는 형상 속에서 살고, 형상이라는 안경으로 풍경을 보았던 것이다. ‘모나리자’에 와서 마침내 형상에서 해방된 순수한 풍경이 가능하였다. 다빈치가 과학자이듯 내면성의 발견은 과학과 동일한 것이었다. 데카르트가 내면을 발견한 것이 근대적임은 이와 같은 뒤집힘에서 말미암는다(김윤식, {근대소설사 연구}, 을유문화사,1986년).
라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통하여 ‘근대적 인간’의 ‘내면의 발견’을 역설하고 있지만, 그것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반 덴 베르크의 생각에 따르면 서구에서 최초로 풍경이 풍경으로 그려진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부터이며 그곳에는 풍경으로부터 소외된 최초의 인간과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소외된 최초의 풍경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모나리자라는 인물의 미소는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 거기에 ‘내면성’의 표현을 보아서는 안 된다. 아마 사태는 그 역일 것이다. [모나리자」에는 개념으로서의 얼굴이 아니라 맨 얼굴이 처음으로 표현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맨 얼굴은 ‘의미하는 것’으로서 내면적인 무엇인가를 지시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내면’이 거기에 표현된 것이 아니라 갑자기 노출된 맨 얼굴이 ‘내면’을 의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전도는 풍경이 형상으로부터 해방되고 ‘순수한 풍경’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며 사실상 같은 것이기도 하다.
다빈치가 과학자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화가이면서 과학자라는 사실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면성과 근대 과학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가 말하는 ‘연장’(사유 대상)이란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소외된 풍경’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중세의 질적으로 의미 부여된 형상적 공간과는 관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코기토’는 그러한 풍경 안에서만 존재한다
(가라타니 고진, {일본 근대문학의 근원}, 민음사, 1997년)
라는 [내면의 발견」을 이처럼 통째로 베껴먹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가라타니 고진이 그처럼 대단한 인물인가라고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의 글은 반 덴 베르크와 레비 스토로스, 그리고 데카르트와 엘리어트의 사유 속에 녹아 있는 글에 불과하며, 그들의 사유를 빌어다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는 글에 지나지 않는다. “서구에서 최초로 풍경이 풍경으로 그려진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부터이며 그곳에는 풍경으로부터 소외된 최초의 인간과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소외된 최초의 풍경이 존재한다”와 모나리자의 맨 얼굴에서, “내면이 거기에 표현된 것이 아니라, 갑자기 노출된 맨 얼굴이 ‘내면’을 의미하기 시작한 것이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가라타니 고진도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독자적으로 설명을 할 수가 없어서 서구인들의 사유를 빌어왔고, 김윤식도 ‘한국 근대문학의 기원’을 독자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어서 가라타니 고진의 사유를 빌어왔다. 피상적으로 따지고 보면, 가라타니 고진이나 김윤식이 동일한 인물의 다른 두 모습 같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엄청나게 큰 학문적 깊이와 그 윤리 의식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해 본다면, 가라타니 고진이나 김윤식이 다같이 타인들의 말과 사유를 빌어 온 것 같지만, 전자는 그 지적 소유권의 존중과 그것에 대한 정중한 예의를 표시하고 있는 반면에, 후자는 서구의 사상가들도 아닌, 가라타니 고진의 글을 통째로 훔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메이저 회사에 고급로열티를 지불하고 있는 중소기업의 사장에 불과하고, 김윤식은 그 중소기업의 단순 조립품들(싸구려 단순 조립품들)을 너무나도 뻔뻔스럽게 훔쳐내온 파렴치한 잡범에 지나지 않는다. 서양인들의 지혜는 고등사기술로서, 그것은 학교라는 ‘대 교육제도’에 의하여 전수되어야 하지만, 우리 한국인들의 지혜는 ‘한국이라는 야만의 나라’ 이외에는 통용될 리가 없는 파렴치한 잡범들의 한탕주의에 불과하다. 이처럼 글 도둑질- 표절 행위가 무차별적으로 난무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세계정복운동’의 기수로서의 문화적 영웅의 탄생은 커녕, 우리 한국인들의 백만 두뇌는 가장 확실하게 못 쓰게 된다. 김현, 김윤식, 유종호, 백낙청, 김우창 등이여! 그리고 이 땅의 사이비 학자와 비평가들이여! 나의 이 말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를 그대들은 진심으로 하늘 아래 무릎을 꿇고 되씹어 보고, 또 되씹어 보기를 바란다.
유종호는 김윤식보다는 좀 더 세련되어 있고, 그는 그처럼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잡범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시인과 모국어」라는 글을 읽어보면, 지적 소유권자가 가라타니 고진이 아닌, 엘리어트라는 사실만이 다를 뿐, 그 글 도둑질의 수준은 너무나도 똑같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모국어 없는 시인은 시인일 수 없다. 한 사람이 시인이 되는 것은 모국어 속에서 모국어와 함께이다. 외국어 속에서 시인은 시인이기를 그친다. 엄밀하게 말해서 번역시는 시가 아니다. 서사사니 극시에서처럼 플롯이나 작품인물의 조형에 문학적 성취를 부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경우에 번역을 초월해서 살아남는 국면은 소홀치 않다. 그러나 번역을 초월해서 남아 날 수 없는 언어의 국면에 무겁게 의존하고 있는 서정시나 단시의 경우 변역된 시는 시의 戱畵로 떨어지기가 첩경이다
(유종호, {사회 역사적 상상력}, 민음사, 1987년).
이 비슷한 기능은 다른 문학 장르나 예술 장르도 수행하게 마련이지만 시가 각별히 민족적 성격을 띄게 된다는 것은 앞에서도 되풀이 확인한 바 있다. 라틴어가 공동언어였던 서양에 있어서도 시가 일찍감치 민족의 방언을 문학적 활용의 매체로 채용했다는 것은 우연히 아니다. 그리고 시가 민족어를 모체로 해서 그 본령을 발휘한 것은 감정과 정서의 표현에서였다. 따라서 ‘부족의 방언’의 세련을 지향하는 시는 민족의 감정의 세련에 기여하는 역할을 떠맡게 마련이다. 이야말로 시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기능의 하나일 것이다(윗책).
----유종호, 「시인과 모국어」에서
그러나 우리들은 모두 번역한 소설을 읽는 것이 번역한 시를 읽는 것보다는 상실하는 것이 훨씬 적다고 하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과학적인 저술에 있어서는 번역함으로써 질적으로 전연 상실하는 것이 없는 일도 있다. 시가 산문보다 지방적인 특질이 한층 더 많다고 하는 것은 유럽 언어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중세기를 통해서 2, 3백년 전에 이르기까지 라틴어는 철학과 신학과 과학의 용어이었다. 각 민족들이 자체의 언어를 문학적으로 사용하려는 충동은 시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런데 우리들이 시가 원래 감정과 정서의 표현이어야 하고, 또 사상이 보편적인 것에 비하여 감정과 정서가 특수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을 때, 이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인 것이다. 외국어를 통해서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외국어를 통해서 느낀다고 하는 것보다는 용이한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보다 완고한 민족적인 예술은 없는 것이다. 한 민족에게서 그 언어를 강제로 빼앗아버리고 억지로 다른 언어를 가르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민족에게 새 언어로 느끼기까지 하도록 가르치지 않는 한 본래의 언어를 완전히 근절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언어는 곧 감정의 전달체인 시를 통해서 다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방금 ‘새 언어로 느낀다’고 하는 말을 했는 데 그것은 ‘느낀 것을 새 언어로 표현한다’고 하는 말보다 이상의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다. 상이한 언어로 표현한 사상은 동일한 사상이 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상이한 언어로서 표현한 감정이나 정서는 동일한 감정이나 정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T. S. 엘리어트, [시의 사회적 기능」(문학과지성사, 1986년)에서
어느 한 사람이 시인이 되는 것은 모국어 속에서 모국어와 함께이다. 왜냐하면 외국어로 사유하기는 쉽지만, 외국어로 느낀다는 것은 그처럼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는 그 시인의 감정과 정서의 특수한 표현이다. 따라서 상이한 언어로 표현한 사상은 동일한 사상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상이한 언어로 표현한 감정이나 정서는 동일한 감정이나 정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T. S. 엘리어트의 [시의 사회적 기능」의 핵심적인 주제인 데, 유종호는 [시인과 모국어」----그의 가장 뛰어난 글----에서 이처럼 엘리어트의 핵심적인 주제를 어떠한 따옴표도 없이 그야말로 통째로 베껴먹고 있는 것이다. 유종호의 [시인과 모국어」는 ‘머리도 엘리어트이고 꼬리도 엘리어트’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유종호의 글 도둑질은 사상적--이론적 출구가 막혀버린 자의 어쩔 수 없는 표절 행위이며, 타인의 연구 성과를 송두리째 가로채 가는 추악한 범죄 행위일 뿐이다. 그러나 그 글 도둑질--범죄 행위는 더욱더 넓고 넓은 세계를 향하여 울려 퍼져 나가지 못하고, 기껏해야 이 땅의 우리 한국인들----나이 어린 학생들, 그의 제자들, 수많은 문학 독자들, 그리고 또 수많은 학부모들----의 피나 빨아먹는 사악한 범죄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한국문학의 고질적인 병폐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자기 자신의 사상과 문학 이론을 전개해야 할 대목에서는 반드시 서양이라는 타자의 목소리로 대체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나의 주제를 깊이 있게 천착하고 그것을 독창적인 사상과 문학 이론으로 전개할 수 있는 힘이 없는 한, 한국문학비평은 그만큼 공허하고 맹목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중진 비평가들, 아니 대한민국의 모든 학자들----, 우리 한국인들은 이 너무나도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대 사기꾼들을 도대체 어떻게 일망타진할 수가 있을 것인가? 문화선진국이라면 그들은 이미 학문의 이름으로 사형이나 중죄----저작권 침해에 따른 법적 책임은 물론, 대학교수직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의 영구추방----로 다스려 졌을 것이지만, 글 도둑질과 대 사기꾼들의 공화국인 이 대한민국에서의 그들의 명예와 명성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와 니체와 칸트의 얼굴마저도 짓밟아 버리고, 수많은 은하계와 또다른 은하계로까지 울려 퍼져 나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2001년에, ‘한국교수 3명 공동집필 논문’ ‘외국표절 국제망신’을 어쩔 수 없이 보도한 ?중앙일보?(2001년 11월 19일자)마저도 그 글 도둑놈들-- 대 사기꾼들의 명예와 명성 앞에서 ‘박모’, ‘홍모’, ‘백모’로 그 실명을 거론하지 않고 있는 데, 김현, 김윤식, 유종호, 백낙청, 김우창 등의 문화권력은 알프스와 로키 산맥과 안데스 산맥,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을 뛰어 넘어서 ‘天帝의 玉座’로까지 뻗쳐 나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현, 김윤식, 유종호, 백낙청, 김우창이여, 그러나 나는 지극히 유감스럽게, 이 대한민국보다도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처럼, 그 교육제도가 발달되어 있는 나라들처럼 부러운 나라도 없다. 따지고 보면 지구가 둥글듯이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세계의 중심인데, 그 중심이 ‘서울대학교’와 ‘서울특별시’라고 믿고 있는 이 땅의 대학교수들처럼 못난 학자도 없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와 니체와 칸트가 언제, 어느 때 서울대학교 교수와 서울특별시민인 적이 있었고, 또 그들은 그들의 조국에서만 세계적인 대 사상가이고, 아시아나 남미나 아프리카에서는 세계적인 삼류로 전락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김현, 김윤식, 유종호, 백낙청, 김우창 그리고 정과리여, 그대들은 모조리 서울대학교 출신이거나 서울특별시민이기는 하지만, 그대들은 너무나도 유치하고 뻔뻔스럽게 그대들이 그토록 반대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자(아아 그 공산주의자)가 될 때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주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사회적 지위가 그 의식을 결정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부연 설명해 본다면, 그대들은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그밖의 명문대학교와 서울특별시민일 때만이 세계적인 대 사상가----아아, 세계적인 글 도둑질의 대 사상가----가 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그대들이 강원도나 충청도의 주민들이라면, 너무나도 하찮은 삼류 시민과 삼류 학자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경환 전집 {행복의 깊이} 제1권(도서출판 지혜, 2012년)에서
조선일보는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인 이문열을 제명시켜라!
이미 대부분의 독자들은 눈치를 챘겠지만,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와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단편소설과 중편소설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똑같은 주제, 똑같은 구조, 똑같은 이야기, 그리고 똑같은 등장인물들의 성격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고, 그것은 아마도 이문열이 황석영의 소설을 하나 하나 모조리 베껴갔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황석영의 소설이 1970년대 초의 작품이고, 이문열의 소설이 1987년도 작품인 만큼---- 황석영이 외국 작가의 작품을 하나 하나 모조리 베낀 것을 보고 이문열 역시도 공범자의 미소를 띠고 그 모방범죄를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황석영이 그의 작품, 「아우를 위하여」가 표절된 것을 알고 묵인해 왔다면, 그는 이문열과의 떳떳치 못한 검은 거래를 했을 것이고, 적어도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공범자의 침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후자의 가능성이 매우 큰 데,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작품의 주제, 구조, 이야기, 그리고 등장인물의 성격까지도 하나 하나 모조리 베껴간 대사기꾼의 범죄행위를 용서할 수 있는 작가는 아마도 이 지구상에서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사소한(?) 범죄행위의 산물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게 되고, TV와 연극과 영화의 텍스트가 되고,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베스트 셀러----아직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가장 많이 팔리는 스테디 셀러 중의 하나일 것이다----가 되어준 것은 우리 한국문학사의 비극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어디 그뿐이던가? 이미 앞에서 소개했던 대로, 대한민국의 가장 대표적인 문학작품으로 일본, 스페인, 콜롬비아, 이탈리아 등의 언어로도 번역되었고, 이제는 어느덧 초등학교의 교과서에까지도 실리게 되었다. 이문열의 더럽고 추악한 글도둑질----절도행각----이 단군 이래의 최대의 대형사기사건으로 이어지고, 그에게는 수십 억원대의 돈과 명예와 명성을 안겨다가 주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아, 우리는 이것을 ‘지적소유권’을 지상최대의 명제처럼 받들어 모시는 문화선진국민들에게, 또 그리고 너무나도 티없이 맑고 순진한 이 대한민국의 어린 학생들에게 어떻게 사죄하고 설명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반경환,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고발한다}에서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대한민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소개되고, 또 이 땅의 어린 아이들이 이문열의 도덕적 정결성에 찬양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이문열의 개인의 영광과 그를 배출해낸 민음사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서 천하의 대사기꾼적인 그의 글도둑질을 언제까지나 쉬쉬하고 덮어두고만 있을 것이란 말인가? 이문열은 대한민국의 대작가도 아니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보다도 더 도덕적 정결성을 갖춘 인간도 아니다. 자기 자신의 역사 철학적인 무지와 그것의 한계를 극복하고, 호머나 셰익스피어나 괴테처럼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게 세계정복운동을 펼쳐나가야 되는 것이 그의 사명이건만, 기껏해야 무협소설에 불과한 ?삼국지?와 ?수호지?와 ?초한지?를 평역하고 있는 추태를 생각해 본다면, 그의 작가 의식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상업성으로 물들어 있고, 돈과 명예는 같은 무대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려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문열은 역사와 민족 앞에, 이 글을 읽는 즉시 사죄하고, 그의 대부분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이제는 한국문단에서 은퇴를 해야만 한다. 이제 모든 대학생들과 시민단체와 민족문학작가회의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이러한 한국문단의 국제적 망신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기 위해서라도, ‘이문열의 은퇴와 절필 선언’을 유도해야만 하고, ‘글도둑질 추방운동본부’를 상설하여 하루바삐 표절의 문제를 근절시켜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반경환,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고발한다}에서
대한민국의 백만 두뇌를 그토록 철두철미하게 입시지옥---문화선진국 그 어느 나라에도 없는 주입식 교육----을 통해서 거세시키고, 그 결과,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이 모조리 ‘표절의 대가들’로 자라나도록 더욱더 고귀하고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민국의 예술원의 회원님들이여!
오오, 괴테보다도, 마르크스보다도, 셰익스피어보다도 더욱더 고귀하고 훌륭한 ‘표절의 대가들’인 대한민국의 예술원의 회원님들이여!
—《애지》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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