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작은 것에서 소설의 광맥을
오정희(소설가)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글을 써왔습니다. 당시 경기도에 속했던 인천에 살았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도내 백일장에 가서 장원을 했었습니다. 그것이 글쓰기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 자신이 글을 쓰게 된 데 대하여 운명이라든지 숙명, 필연성 따위의 비장미를 풍기는 수식어를 쓰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글을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적정한 교육을 받은 중산층의 주부로서 평범하게 살아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암기 위주의 공부가 싫었던 여고 시절, 별다른 재주가 없었던 저는 약간의 문장력에 기대어 일어섰고,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다른 길을 걸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또 그 이후에 제가 만난 선생님이라든가 벗들이 경쟁심과 열정을 부추겨 주지 않았더라면 역시 한 작가로서의 입지가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대학 시절 교수님께서 "천재는 집념에 다름 아니다"라고 말씀해주신 게 생각납니다. 미국의 작가 윌리엄 포크너는 작가는 "99%의 재능과 99%의 훈련과 99%의 노력으로 탄생한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제 나이 스물한 살, 대학교 2학년 때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30여 년의 작가 생활을 해오는 동안 여섯 권의 창작집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의 작품 생산량은 과작(寡作)에 속하고, 그래서 저에게는 과작의 작가라는 별칭이 따라 다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끊임없이 문학이 뭘까 소설은 어떻게 써야 할까에 매달려 왔고, 전전긍긍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 생활과 창작이라는 데 두 다리를 걸치고 엉거주춤하면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자괴감으로 고뇌하기도 했습니다.
한 순간의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를 키운다
가끔 왜 내가 많이 쓰지 못하고 본격적으로 작가로서 살아오지 못했는지 분석을 해봅니다. 우선 게으름 탓도 클 것입니다. 한편으로 글을 쓰는 과정에서 크게 의식되고 말해지지는 않지만, 확실히 삶 속에 깃들어 있으면서도 우리 인생을 지배하는 어떤 것들을 예민하게 담아 내고자 하는 욕망이, 분위기나 이미지에 집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야기 줄거리보다도 분위기나 이미지에 집착하는 성향의 제게 있어서 소설 쓰기란 한 단어 한 문장과의 싸움입니다. 또한 제 몸과 정신을 뚫고 지나간 것이 아니면 어떤 상상력도 믿지 못하는 의심 많은 저의 성향, 또한 글을 쓸 때마다 갖게 되는 자모(字母) 하나하나까지도 뒤집어 버리고 싶은 참을 수 없는 파괴 욕구… 이런 것들이 저로 하여금 많은 작품들을 생산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저의 생활에 기대어 있습니다. 저는 상당히 단조로운 생활을 하고 있고, 생활을 단순화시키려 애쓰고 있습니다. 걸레질을 하거나 밥을 하면서도, 머리는 머리대로 따로 가동을 하는 거죠. 담요나 스웨터의 올 하나를 터서 잡아당기면 죽 풀리듯이 일상적으로 부딪치고 만나는 것들 속에서 모티브를 찾아내곤 합니다.
제게 있어서 생활을 단순화한다는 것은 단순화시킴으로써 그것이 확대되어 보이도록 하는 것이죠. 돋보기를 들이댈 때 자세히 보이면서 크게 보이면서 의미도 커지는 것처럼. 뭔가 다가오고 난 다음에는 오래 묵히고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단편을 하나 쓰는 데는 20일쯤 걸리지만, 실제로 생각하는 건 여섯일곱 달쯤 걸립니다.
저를 스치고 지나간 느낌이나 분위기는 남의 이야기를 듣고서 이걸 소설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제게 뭔가 휙 스쳐가는 이미지에서 출발하곤 합니다. 뭔가 다르다, 뭔가 표현해 보고 싶다는 작은 욕구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 다음 아주 빈약하게나마 이야기 줄거리를 조금씩 만들어 보곤 합니다.
저는 문학 이론으로 말하면 문학 이론가를 따라갈 수 없고, 글이란 백 권의 이론서를 읽느니보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한번 써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글은 끊임없이 쓰고 또 쓰면서 배우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왕의 이론서 이곳저곳에서 뽑아서 말하느니보다, 제 소설의 배경이라든지 집필 경위 따위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저의 초기작, 주로 20대에 쓴 소설들은 정상적인 삶의 틀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생활이나 정신적 신체적 장애자들, 뒤틀린 성의 이미지들이 등장하여 광기와 파격으로 가득 찬 소설들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저는 거기에 대해서 제 젊은 날의 참혹한 자화상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제 소설이 광기와 파격으로 가득 차 있다는 평에 대해서 저는 종종 소설을 쓰고 읽으려는 욕망 자체가, 이미 당연하고 상식적인 세계로부터의 일탈과 자유, 파격에의 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대답하곤 합니다.방황하는 청춘기에 가졌던 자신과의 대화, 세상과의 불화가 그러한 소설들을 쓰게 했다고 봅니다.
그 이후에 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비로소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작품 세계의 변모를 겪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낳고서야 비로소 저는 음습하고 폐쇄적인 20대와 결별할 수 있었습니다. 모종의 뒤틀린 환상으로 가득 찬, 마치 열병을 앓듯이 치른 청춘기와 결별할 수 있었습니다.
제게 호의를 보이지 않은 세상을, 혼돈과 질서를 원한과 질시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어렴풋이 싹텄던 것이지요.
여자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 없이 당연한 일이지만, 제게는 인생관과 세계관이 바뀌는 획기적이고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아이는 세상과 저를 이어주는 통로였습니다. 저는 아이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바라보고, 상처와 아픔으로만 기억되는 어린 시절을 비로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시절의 이야기를 쓰는 한편, 일상적인 삶 속에 깃든 죽음과 탄생, 깊은 비극성에 한층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제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여성의 삶의 의미에 천착하게도 되었습니다. 남성과 대립·대비되는 존재로서의 여성이라기보다, 어떤 본질적인 여성성, 즉 생산하고 품고 떠나 보내는 자의 고독과 환희, 신비를 끝까지 파헤쳐 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났습니다.
이제껏 써온 제 소설의 주인공들은 굳이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예닐곱 살의 어린아이로부터 죽음을 앞둔 늙은이까지 모두 여성들이고, 저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외형적인 활동이나 변모보다 내면의 움직임에 초점을 두고, 저 자신의 그것을 투사시키는 형식을 채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순간순간 포착되고, 시간 속에서 흐르고 망각되어지는 편린들을 모아서 보편적인 여성적 생육의 모습을 복원해 보고자 하는 저 자신의 소설적 노력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저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평범한 중산층 여성의 정서, 심리, 내면적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낳고 기르고 남성과도 화해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그녀들은 유년기의 정신적 외상으로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현실을 버텨갑니다. 타인의 존재로 고통받고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희망 없는 기다림과 환상으로 현실을 버텨가죠. 그녀들에게는 때로 일탈과 초월의 욕망, 타오르는 생에의 열정이 있는가 하면 남루하고 지루한 일상의 권태에 지쳐, 무기력한 신음을 내뱉기도 하고, 자발적인 희생과 헌신, 모성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완전하지 않은 생의 슬픔이나 자신을 거부하는 세상, 욕망을 가두는 억압 기제들에 대해 불임이나 불구, 태아 살해라는 모티브로 대항하기도 합니다.
외형 아닌 내면의 움직임에 초점을
제 작품들 중에서 문학적인 완성도가 높다거나 혹은 애착을 갖고 있다거나 하는 것들을 떠나서, 제 문학 세계를 펼쳐 나가는 데 모종의 분기점이 되고 기점이 되어준 몇몇 작품들을 놓고 그것을 쓰게 된 배경, 그리고 저의 생각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창작집의 맨 마지막에 실린 표제작 「불의 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결혼이 좀 늦었고 아이도 좀 늦게 낳았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없는 기간이 약 3년 정도 있었는데, 이 작품은 결혼 초기라서 물질적으로도 아주 가난하고 새로운 생활에서 오는 정신적 긴장이 아주 심했을 때 쓴 글입니다.
결혼에 즈음해서는 가난하다는 것이 아주 정결하고 의롭게까지 여겨져 아주 떳떳하게 결혼을 했지만, 막상 살림을 꾸려 가는 건 현실이라서 돈벌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결혼 후에도 직장에 다니다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고 남의 글 고치기, 윤문 하는 일 따위를 받아와 집에서 했습니다.
저 자신 노동의 가치는 인정하면서도, 창조적인 일이 아니라 그저 품을 팔고 있다는 자괴감과 고통 같은 것들이 삶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작가로서의 순수한 창작욕이 아닌 글품을 팔고 있다는 것, 그런 것이 이 작품을 낳게 했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끊임없이 재봉틀을 돌리는 공장 직공 이야기가 나오는데, 노동에 갇혀 절망한 생, 그것을 파괴하는 방법으로 불을 지르는 이야기입니다.
제 소설 「불의 강」과 그것이 실린 작품집은 제 개인적인 삶에서 상당히 의미를 갖는 것들입니다. 창작집을 내면서 첫 아기를 낳았고, 그것을 기점으로 저의 작품 세계도 달라졌습니다.
저의 겨우 한번 발표된 작품들은 지나온 길이라는 생각에 잘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럴만한 계기가 있어서 읽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제가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더군요. 채 제 자신이 소화하지 못하면서도 심취했던 김동리, 황순원, 카프카, 포크너, 마그리트 뒤라스… 이런 분들의 체취가 많이 배어 있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 겪은 한국전쟁 와중의 피난지에서 겪은 일들을 쓴 「유년의 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은 제 두 번째 창작집의 표제작입니다. 뜻 아니한 전쟁으로 분열되고 와해된 한 가정, 그 속에서 도벽에 젖어드는가 하면 끊임없이 허기증에 시달리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허기증은 애정과 물질을 두루 가리키는 말입니다.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평범한 가정에서 순진하게 자랐을 소녀는 아버지의 징집과 어머니의 전락, 오빠의 폭력 등 황폐한 유년의 시간을 겪으면서 어쩔 수 없이 인생의 불가해한 삶의 그늘에 일찍 눈을 뜨게 됩니다.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가정에서 여성들이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고 변모해 가는가가 화자인 노랑눈이라는 어린 소녀와 어머니, 할머니를 통해서 그려지죠. 일찍 남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부당하게 버림받고도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인 채 의붓딸에게 의탁하여 굴종적인 삶을 살아가는 할머니, 얌전한 주부였지만 가장이 없는 집의 생계를 위해서 술집 작부로 생활하면서 안팎으로 모욕과 상처를 받는 어머니….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울안에서의 노예와 울 밖의 훼손이라는, 제 윗세대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부정적인 여성상이 어린 소녀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죠.
폭력을 휘두르는 오빠는 남성의 표상이고,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이때 겪는 경험이 여성의 삶에 대한 이분법적인 완강한 사고를 만듭니다. 안에서는 노예이고 밖에서는 훼손이 된다는 사고가 고착되는 거죠.
또 오빠의 폭력성은 남성이 사랑과 화합의 대상이라기보다 불신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고착되는 원인이 됩니다.
「유년의 뜰」을 쓸 무렵은 19080년 봄이었습니다. 남쪽으로부터는 흉흉한 소문만 들리고, 진상을 알 길이 없이 우리 나라 전체가 공포 분위기에 휩싸여 있을 때였습니다. 저 역시 대학에 있던 남편을 찾아 곳곳에서 걸려오는 전화며, 수사기관으로부터 연락으로 시달리고 있었는데, 정작 남편은 장마철에 산더미 같은 짐을 꾸려 낚시를 간다며 떠나 버린 상태였습니다. 저는 어린 아들과 단둘이서 집을 지키면서 밖이 너무 혼란스럽고 두렵고 알 수 없었습니다.
명색이 글을 쓴다는 입장에서 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서 많은 문인들, 지식인들, 또한 노동자들이 잡혀가고 고초를 당했을 때 저 자신은 너무 가정적인 안일의 벽을 넘어가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작가로서 두려워서 발언하지 못한 것, 알지 못해서 발언하지 못하는 것, 행동하지 못하는 것들이 제 마음의 짐이 되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 제 안으로 저를 침잠하게 만들었습니다. 지난 일이니까 이렇게 말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고, 모종의 가책이나 부채감 같은 것들이 제 안으로 제 안으로 저를 도피시켰던 것 같습니다.
저는 78년도에 춘천으로 갔습니다만, 낯설고 유배당한 듯한 고독감, 그리고 마음의 부채감,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 제 안으로 저를 도피시켜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저의 유년으로 눈을 돌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썼습니다.
다양한 삶을 경험하지 못한 저로서는, 글을 쓰는 데 강력하고 자신 있는 것들은 제 안 들여다보기입니다. 제 안에서 뒤져내고, 저를 스쳐간 것, 제게서 발화한 것들에 대해 제 상상력은 많이 기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 생활과 마음에서 피어난 것들에 많이 기대기 때문에, 아무리 다른 소재를 택하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도 결국 제가 쓰는 글은 자전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년의 뜰」에 이은 단계가 저로서는 「중국인 거리」입니다. 이것은 피난살이를 마치고 도시로 돌아온 가족들의 이야기입니다. 중국인 거리는 오늘날 인천의 차이나타운을 가리킵니다. 사춘기의 문턱에 선 소녀는 미군들에게 몸을 파는 양색시들의 화려한 모습에 매혹되고, 중국인 청년에게 아련한 동경을 품는가 하면, 할머니의 죽음을 겪고, 아이를 출산하는 어머니의 처절한 비명을 들으며 첫 생리를 경험하면서 여성으로서의 자각과 성의 정체성에 막연하게나마 눈을 뜨게 됩니다.
가족이라는 울을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면서도 연이어 아이들을 낳는 어머니의 삶이 동물적이라는 연민과 경멸감을 동시에 보내면서 여성적 삶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소설 속의 작은 소녀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기르는 평범한 주부로서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혼을 새로운 뿌리내림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에서 여자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여자의 기대는 이내 스러집니다.
안방에서 건넌방으로 옮겨가듯이 재빨리 모성의 자리로 옮겨앉으며 결혼이라는 안전한 장치, 공인된 미덕에 기대어서 충실한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지루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권태에 지치고 존재론적인 불안감에 시달리는가 하면, 한계지어진 생의 조건에 절망하게 됩니다. 이중적 사고와 의식에 시달리게 됩니다.
결국 가정과 부부간의 사랑이 또다른 혼돈과 투쟁, 불화의 자리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둠의 집」이라는 소설 속에서는 쉰 살 가량의 평범한 가정주부가 어느 겨울 밤 20분 동안 계속된 등화관제로 인한 어둠 속에서 겪는 심리적인 불안감을 그린 것입니다. 남편과 아이들이 저마다의 일로 뿔뿔이 밖에 나가 있는 동안 전쟁과 재난에 대비한 등화관제 훈련이 실시되지요.
불길하고 느닷없는 공습 경보에 이어서 적기가 나타나고, 라디오에서는 다급하고 위험한 상황 설명을 내보냅니다. 실제 상황이 아닌 가상의 적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알면서도 주인공에게는 그것이 바로 삶 속에 숨어 있는 뜻하거나 예상한 바도 없고 예고되지 않은 재난, 잔인함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인간과 운명의 상징처럼 다가오죠.
항상 마음 속 깊이 만성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불안을 표면으로 열어 보이면서, 물이 새고 벽이 갈라지는 집에 대한 푸념, 어둡고 쓸쓸한 집에 자신만을 남겨둔 채 돌아오지 않는 가족들을 원망하는 것으로 불안의 원인을 무마시켜 보려 하죠. 그렇지만 시간이 갈수록 긴장은 고조되고 그 여자는 자신이 극구 덮어 버리고 외면해 왔던 생의 본래 얼굴과 맞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집을 가꾸고 때때로 손님들을 청하고 화기애애한 우의를 나누는 등 평온한 생활 관습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무서운 공허와 권태, 낯설음, 배반감과 모멸감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러하듯이 그 여자의 생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자식들은 개체로서 떨어져 나가고, 정상적인 부부로서의 생활을 거부하는 남편에 대한 의심, 불안한 관계를 애써 동화처럼 미화시키려는 자신에 대한 분노와 환멸이 깊어지게 되는 겁니다.
방수 처리가 안된 지붕과 천장으로부터 물이 새어 누전의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는 것, 갈라진 벽 틈으로 스며들어온 바람처럼 전류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집안을 감돌며 흐르고 있는 것이 결코 외면적인 현상만은 아니라는 실존적 자각을 갖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그 여자는 자신의 지난 생애와 현실을 직시하면서 늙어가는 여자, 자신의 고독 속에 갇힌 여자의 모습과 텅 빈 심연이라는 현실 인식에 도달하게 됩니다.
삶은 청춘을 빛나게 하던 사랑과 열정을 마모시키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엮어진 가정을 무관심과 타성과 반성 없는 관습으로 낡아가게 하지만, 또한 서로에게 기쁨과 슬픔과 상처를 주며 서로 배반하는 가족 각자 인간으로서의 조건과 운명을 끌어안고 부딪쳐 가는 외로운 존재라는 연민의 정에 눈뜨게 하는 것입니다.
「별사」라는 작품은 81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80년에 아이와 단둘이서 보낸 시간의 기억을 되살려 쓴 작품입니다. 삼십대 중반으로 접어든 여주인공이 백중날(백중(伯仲)은 불교에서는 죽은 자들을 위해 제를 올리는 날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를 떠나서 친정 어머니와 함께 부모가 미리 마련해둔 묘소를 다녀오는 하루 동안의 일을 그린 것입니다.
군부 독재치하였던 80년대 초 우리 사회에 흔히 있던 일, 즉 많은 사람들이 체제에 반대했던 생각과 행동 때문에 실종되고 구금되던 공포의 시절, 주인공의 남편 역시 대학 강단에서 해직되어 떠도는 입장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 혹은 환상과 현실의 교차로 엮어지는데, 머지않아 죽음을 맞게 될 늙은 어머니와 함께 묘에 가서 미구에 닥칠 부모의 죽음을 생각하고, 이에 대비되는 생명력이 충만한 어린 아들을 바라보며 주인공의 의식은 정처 없이 집을 떠도는 남편의 모습을 쫓고, 환상 속에서 남편의 죽음을 봅니다.
그것을 읽은 한 평론가는 왜 굳이 남편의 죽음이 현실과 환상이 섞인 자리에 놓는가에 대해서 어떤 상상적인 미망인 의식, 혹은 살부(殺夫) 의식 등과 결부시켜 세 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첫째는 남편의 행방에 대한 우려와 불안 의식, 혹은 불안한 예감, 둘째는 미래의 시간에 대한 허무 의식, 또는 희망의 소진이며, 셋째는 남편으로부터 독립된 자리에서 자기만의 정체성을 확인해 보고자 하는 여성적 의도를 들었습니다. 그를 통해 여성의 실존적 조건을 바꿔보고, 그 바뀐 자리에서 자기 정체성을 진지하게 성찰하거나 가부장적인 억압이 짓누르는 집으로부터 벗어나 밖의 사회와 몽상을 꿈꾸는 여성적 영혼이 보여주는 복합 심리로 보고 있는데, 저는 이것을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삼십대 주인공의 의식 깊숙이 들어 있는 상상적인 미망인 의식, 살부 의식을 지적한 데 대해서 매우 감탄을 한 바 있습니다. 무슨 비밀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바람의 넋」은 제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데, 아이가 '바람이 무서워' 하면서 제 치마에 감기던 데서 시작된 소설입니다. 삼십대에서 사십대에 이르면서 온전하게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깃든, 출분의 욕망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을 그렸습니다.
해결될 수 없으리라는 것, 결국은 회귀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걸 알만큼 눈이 밝아진, 그렇지만 삶의 권태에 지치면서 끊임없이 고뇌에 시달리는 가출, 출분의 욕망, 근원적인 그리움에 대한 갈구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본질을 끊임없이 찾는 여성을 그린다
「옛우물」은 마흔 다섯 살 먹은 여자의 육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소설은 크고 오래 된 우물이라는 것을 주요 기제로 설정해 놓고 있습니다.
우물은 특히 한국인,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거나 저만한 나이의 여성들에게 원형적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저절로 물이 차올라서 고이는, 때로는 이유도 모르는 채 물이 말라 적막하게 빈 우물이 되는 것은 불모와 두려움, 황폐함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또한 땅 속에 물이 솟아 고이는 곳, 둥그렇고 어둡고 깊은 우물은 생산자로서의 여성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물 속의 금빛은 아주 강렬하게 생명력 있는 색채를 띱니다.
오래 전에 죽은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을 간직한 채 내색 않고 살아가는 나날들이지만, 부재를 통해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는 그의 존재는 주인공의 의식에 균열을 일으킵니다. 일견 평온해 보이는 마음 안쪽 그의 죽음과 함께 죽어버린 것이 자기 안의 무엇이었던가에 대해 천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과 소리의 끝까지 지옥에까지도 함께이고 싶었던 그리움, 사랑이 무엇이었던가에 천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다시 살면서 시간 속에서 되살려내면서 주인공은 어린 시절 할머니로부터 들은 옛우물의 전설, 즉 옛날 어느 각시가 우물에 금비녀를 빠뜨렸는데, 각시는 상심해서 죽고 금비녀는 금빛 잉어로 변해서 천년을 살다가 용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생각하게 되죠. 그래서 그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각시의 슬픔과 죽음을 통해서 금비녀는 비로소 금빛 잉어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물은 생명과 신화의 공간이 되죠. 주인공은 비로소 삶과 죽음이 맞물려 둥근 원형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들의 현존(現存), 지금 여기 생의 순간들이 눈부신 찬란한 고리를 이룬다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제가 소설 속에서 그려내는 여성들은 일견 자신의 운명과 상황에 대해서 수동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저는 어느 길 어느 장소에서나 만날 수 있고 지나치고 나면 곧 잊혀질 익명의 그녀들 속의 갈망과 욕망, 고독, 외침들에 시선을 주며 그것들을 쓰고 싶었습니다.
제 소설 속의 여성들은 그녀들의 의식·무의식을 지배하는 자궁을 가진 사람들의 원죄 의식(즉 자궁을 가졌다는 것은 생명과 함께 죽음을 잉태한다는 뜻입니다.)을 쓰고 싶고, 그녀들의 삶에 사로잡혀 있으며, 저 역시 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서 영위하는 삶과 이루어질 수 없는,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는, 꿈과 갈망 사이의 길항(拮抗)관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녀들은 절망하거나 환상의 여행을 떠나거나 결국은 죽음으로 귀결되는 심연을 묵묵히 응시하며 전율하기도 합니다.
일상에 매몰되거나 세속의 가치와 타협하지 않고, 본질과 근원을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 그녀들의 시선은 필연적으로 자기 정체성 찾기 쪽으로 뻗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탄생과 죽음의 신비나 비밀을 여는 데까지 이르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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㟍 작가 연보 㟍
1947년 11월 9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아버지 오성환과 어머니 고숙녀의 4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남.
1951년 1·4후퇴 때 국군을 따라 피난길에 오름. 충남 홍성군 홍주읍 오관리에서 피난살
이 시작.
1954년 충남 홍성군 홍주읍 홍주국민학교 입학.
1955년 인천 신흥국민학교 2학년 전학. 제2국민병으로 징집되었던 아버지가 돌아오고
석유회사 인천 출장소 소장직으로 취직되어 가족들은 5년간에 걸친 홍주 오관리
피난살이를 끝내고 인천시 중앙동으로 이주.
1956년 국민학교 3학년 가을. 경기도내 백일장에세 「오늘 아침」이라는 산문으로 특선.
소설가가 되리라는 소망을 품게 됨.
1959년 5월. 아버지의 전근으로 가족들은 서울로 이주. 마포구 신수동에 자리 잡은.
종로구에 있던 수송국민학교에 6학년으로 전학. 중학입시공부를 하느라 각성제를
몰래 오래 복용하여 몽유병 비슷한 증세로 고생. 보통의 수험생과 다른 점은 교
과서 틈에 『이해와 오해』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황야의 이
리』같은 대학생 오빠 책을 몰래 끼워넣고 다녔다는 것. 우리나라 작가로는 이광
수, 김동인, 박화성, 최정희, 황순원의 장편소설을 읽고 전후작가들의 소설도 접
하기 시작. 지적욕구가 강렬하고 독서량도 많아 정신의 성숙이 눈에 띄게 이루어
지는 시기.
1960년 이화여자중학교 입학. 평균치에 훨씬 못 미치는 키와 몸무게 때문에 건강을 위
해 휴학을 하든가 운동을 하라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정구부에 들어감. 중2 때
막내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음. 이후 3학년 때까지 정구선수로 운동장에서 생활.
운동을 하면서도 짬짬이 소설책을 일고 30,40매 정도의 짤막한 소설들을 써보기도
함. 덕분에 <개똥철학자>란 별명을 얻음.
1963년 이화여자고등하교 입학. 운동선수 생활은 그만두었으나 공부에는 뜻이 없어 닥
치는 대로 책을 읽고 심한 문학병을 앓음.
1966년 작가가 되리라는 결심을 굳히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진학. 책으로만 만
나던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의 강의를 들으면서 몇 편의 소설을 써보고 문학하
는 삶의 어려움 따위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만 재능과 광기가 없음을 괴로워함.
1968년 대학 2학년때. 중앙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부에 「완구점 여인」당선. 사실상
의 습작기 시작.
1969년 단편 「주자」를 《월간문학》에 발표.
1970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조교로 근무. 「산조」, 「직녀」를 《월간
중앙》, 《월간문학》에 각각 발표.
1971년 잡지사, 출판사 등지로 직장을 전전. 소설 「번제」를 《월간문학》에 발표.
「봄날」, 「관계」발표.
1974년 결혼.
1975년 「목련초」발표.
1976년 「안개의 둑」(《뿌리깊은나무》),「적요」(《문학사상》), 「미명」(《문학과 지
성》), 「야곱의 꿈」발표.
1977년 「불의 강」을 《문학사상》에, 「한낮의 꿈」을 《한국문학》에 발표.
창작집 『불의 강』을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냄. 「미명」,「동행」발표.
1978년 4월.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전임강사로 임용된 남편을 따라 춘천으로 이주. 「꿈꾸
는 새」(《뿌리깊은나무》)발표.
1979년 「저녁의 게임」(《문학사상》), 「중국인 거리」(《문학과지성》), 「비어 있는
들」발표. 「저녁의 게임」으로 문학사상사 제정 제3회 이상문학상 수상.
딸 정기 출생.
1980년 「유년의 뜰」(《문학사상》), 「겨울 뜸부기」(《문예중앙》), 「어둠의 집」
(《뿌리깊은나무》)발표.
1981년 「밤비」, 「별사」(《문학사상》), 「야회」(《세계의문학》), 「인어」(《소설문
학》)등 발표. 두 번째 창작집 『유년의 뜰』을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
1982년 「동경」(《현대문학》), 「바람의 넋」,「하지」(《월간조선》)발표. 「동경」으
로 동서문화사 제정 제15회 동인문학상 수상.
1983년 「지금은 고요할 때」(《세계의문학》),「불꽃놀이」,「전갈」(《문학사상》),
「불망비」(《문예중앙》)등을 발표. 「멀고 먼 저 북방에」, 「순례자의 노래」
발표.
1984년 「새벽별」(《학원》)발표. 8월 뉴욕 주립대 교환교수로 나가는 남편을 따라 가
족이 뉴욕 주 올바니 시로 이주.
1986년 귀국. 창작집 『유년의 뜰』이후 쓴 작품들을 모아 쎄 번째 창작집 『바람의
넋』을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냄.
1987년 「그림자 밟기」(《문예중앙》), 「저 언덕」, 『불망비』를 고려원에서 간행.
1989년 「파로호」를 《문예중앙》에 발표.
1990년 창작집 『야회』(나남) 간행.
1993년 장편동화집 『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한양출판사), 소설집 『술꾼의 아
내』(작가 정신사) 간행.
1994년 「옛우물」을 《문예중앙》에 발표. 『옛우물』을 청아출판사에서 간행. 수필집
『허리 굽혀 절하는 뜻은』(창출판사) 간행.
1995년 현재 강원도 춘천시 퇴계동에 거주. 「새」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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