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
오 정희
작가라는 직업 탓에 사람들로부터 종종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부러움과 함께 '글쓰기'에 대한 비법을 묻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즉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외에는 달리 왕도가 없다는 교과서적인 말을 되풀이하곤 한다. 또한 글쓰기의 과정이란 작게는 바느질을 하거나 음식을 만드는 일, 크게는 건축물을 짓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체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를 곁들인다. 음식이든 작은 소품이든 무엇인가를 만들기 전에 우리는 그 쓰임새와 모양과 영양가, 특별한 맛 따위를 생각하고 마침내 우리가 가진 지식과 상상력, 방법론을 동원하여 디자인하고 착실히 그 공정을 밟아 완성한다. 집을 지을 때도 그렇다. 지을 집의 모양과 기능, 미의식을 염두에 두고 얼개를 단단히 하고 방과 거실과 주방을 적절히 배치하고 소통시키며 유기적인 관계를 맺게 한다. 밖에서 보면 출입문과 창문, 벽과 지붕 뿐이지만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가면 빈틈없이 효율적인 공간배치와 섬세하고 복잡한 사람살이의 모습과 결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집과 글의 구성은 다르지 않다. 이처럼 무엇인가 만들어가는 과정은 한단어, 한 문장에 고심하고 번민하며 한줄씩 써서 한편의 글을 완성하는 글쓰기와 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과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은 글쓰기를 문필가의 전유물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어떤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글쓰기에 대한 욕망과 행위에는 쓰기와 읽기와 이해하기 즐기기 배우기의 욕구가 함께 들어 있다. 앞서 말했듯이 쓰기와 읽기와 생각하기는 이처럼 삼각의 구도를 이룬다. 좋은 글을 보는 눈이 없으면 좋은 글을 쓸 수 없고 그 눈을 얻기 위해서는 남의 좋은 글을 많이 읽는 수밖에 없다. 결국 쓰기란 자기가 읽은 글의 모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는 욕구는 강하고 글감에 대한 발상도 찬란한데 정작 시작하는 데 대한 어려움이 크다고 토로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우선 펜을 잡고 책상 앞에 앉으라고 말한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직접 써보기 전에는 자기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무엇이 쓰여질지 자신도 모르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작가란 앉아서 펜만 잡으면 신명과 영감에 의해 자동적으로 글이 나오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대문호 괴테는 글을 쓰고 산 70년의 세월 중 편하고 행복했던 날들은 한달이 채 안되었다고 탄식했으며 미국의 대작가인 윌리엄 포크너는 글을 쓰려 할 때의 작가를 '어느 곳을 향해 짖어야 할지 모르는 사냥개'에 비유했다. 그만큼 두렵고 막막하다는 뜻일 게다. 어느 화가치고 텅빈 캔버스의 공포를 말하지 않으며 어느 작가치고 백지앞의 고독과 공포를 말하지 않는 자가 있던가. 머릿속에서 들끓던 이야기들이, 통찰력들이 막상 종이를 대하고 앉았을 때는 흔적없이 사라져버리던 경험은 누구나 있다. 머릿속의 근사한 생각, 기발한 착상 등이 백지를 앞에 두고 앉았을 때 완전히 텅 빈 공백이 되어버리는 경험이나 생각과 감각의 놀라운 휘발성 앞에서 낙담하고 절망했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어느 문필가는 '꼭 써야 한다면 무조건 써라. 재미없고 골치아프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남들은 다 온다는 그 영감이라는 것이 오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기분이 좋든 나쁘든 책상으로 가서 그 얼음같이 냉혹한 백지의 도전을 받아들여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인생을 알게 되듯이 글쓰기란 스스로 써나가는 중에 터득된다.
프랑스의 작가 플로베르는 글을 쓸 수 있는 자질의 하나로 골방에 혼자 들어앉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들었다. 글을 쓰기 위해 앉았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작은 의자 위에 묶어놓고, 끊임없이 공격해오는 내부의 많은 적들과 싸워야 한다. 어떤 훌륭한 작가라도 작업 중에 맞닥뜨리게 되는 재능에 대한 회의, 잘써지지 않는 글에 대한 지겨움과 고통, 자신의 작업자체에 대한 의미찾기 등과의 싸움이 치열하게 마련이다. 또한 좋은 글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진 지식과 정보와 자료, 감성의 그물에 걸리는 모든 것들을 담고자 하는 유혹과도 싸워야 한다. 쓰고자 하는 글의 진정성을 위해 자기 현시 욕망도, 미사여구로 아름답게 치장하고자 하는 욕구도 최대한 버리고, 벗기고 깎아야 한다.
글쓰기는 영감에 의한 즉흥적 탄주가 아니다. 신의 계시도 오랜 기도 끝에 들려오는 것이며 영감이라는 것도 오랜 내공과 충분한 숙성 후에 찾아오는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 속의 예술가들처럼 어느날 느닷없이 영감에 의해 저절로, 미친 듯이 무엇인가 써지길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글을 쓸 분위기, 기분 등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며 그것은 규칙적으로 일하기, 글쓰기 훈련 습관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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