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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 김용택

by 키미~ 2012. 10. 10.

 

 

 

애 인

 

                               김 용 택

 

 

이웃 마을에 살던 그 여자는

내가 어디 갔다가 오는 날을 어떻게 아는지

내가 그의 마을 앞을 지날 때를 어떻게 아는지

내가 그의 집 앞을 지날 때쯤이면 용케도 발걸음을 딱 맞추어가지고는

작고 예쁜 대소쿠리를 옆에 끼고 대문을 나서서

긴 간짓대로 된 감망을 끌고

딸가닥딸가닥 자갈돌들을 차며

미리 내 앞을 걸어갑니다

눈도 맘도 뒤에다가 두고

귀도, 검은 머릿결 밖으로 나온 작고 그리고 희고 또 이쁜 귀도 다 열어놓고는

감을 따러 갑니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저만큼 서있는 길

샛노란 산국이 길을 따라 피어있는 길

어쩌다가 시간을 잘못 맞추는 날이면

그 여자는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를 높이높이 올라가서는 감을 땁니다

월남치마에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그 여자는 내가 올 때까지

소쿠리 가득 감이 넘쳐도 쓸데없이 감을 마구 땁니다.

나를 좋아한 그 여자

어쩔 때 노란 산국 꽃포기 아래에다 편지를 감홍시로 눌러놓은 그 여자

늦가을 시린 달빛을 밟으며 마을을 벗어난 하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느티나무에다 등을 기대고 달을 보며 환한 이마로 나를 기다리던

그 여자

내가 그냥 좋아했던 이웃 마을 그 여자

들 패랭이 같고

느티나무 아래 일찍 핀 구절초꽃 같던 그 여자

가을 해가 이렇게 뉘엿뉘엿 지는 날

이 길을 걸으면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살아나와

저만큼 앞서가다가 뒤돌아다보며

단풍 물든 느티나무 잎사귀같이 살짝 낯을 붉히며 웃는,

웃을 때는 쪽니가 이쁘던 그 여자

 

우리나라 가을 하늘같이 오래된 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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