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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잠, 한석호

by 키미~ 2013. 5. 17.

 

 

순례자의 잠 

                                  한석호
시간은 저녁의 호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거운 신발을 벗는다. 
거룩한 자여, 
오월은 푸른 장미 향기로 그윽한가 
길은 저만치 수구水口를 따라 휘어지고 있다 
보리의 술렁임이 깊어질 때 
일몰은 치맛자락을 끌고 내려오고 
나는 물끄러미 강물에 발을 담근다 
그러면 세상의 슬픔은 더욱 가라앉고 
새떼가 남긴 하늘의 봉분은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 
나는, 떠나는 이름들과 
새로 쓰는 이름들이 무심히 교차하는 들판에서 
그대를 우러러 부른다 
수척해진 밤의 손길이 
꺼칠해진 대지에 무언가를 쓰고 있다 
자신의 오른 손엔 잠을 내려놓고 
또 다른 손엔 그리움을 내려놓으며 
조금씩 사위어 가고 있다 
하늘의 거룩한 자여, 
부도 위로 검은 나비 떼 날고 있는가 
가을이 가고 겨울의 
쇠 발굽소리 그 경계를 넘어올 때 
나는 떠나리라 
푸른 잠 속엔 누군가 있고 
성성한 갈기를 휘날리는 백마 한 마리 
덫에 걸린 내 잠의 둘레를 자꾸 뚜벅대고 있다 
 

 

제가 좋아하는 시입니다.

오월의 시 마음에 가득 담으셔서

아름다운 날들 보내시기 바랍니다.

 

 

치악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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