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잠
한석호
시간은 저녁의 호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거운 신발을 벗는다.
거룩한 자여,
오월은 푸른 장미 향기로 그윽한가
길은 저만치 수구水口를 따라 휘어지고 있다
보리의 술렁임이 깊어질 때
일몰은 치맛자락을 끌고 내려오고
나는 물끄러미 강물에 발을 담근다
그러면 세상의 슬픔은 더욱 가라앉고
새떼가 남긴 하늘의 봉분은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
나는, 떠나는 이름들과
새로 쓰는 이름들이 무심히 교차하는 들판에서
그대를 우러러 부른다
수척해진 밤의 손길이
꺼칠해진 대지에 무언가를 쓰고 있다
자신의 오른 손엔 잠을 내려놓고
또 다른 손엔 그리움을 내려놓으며
조금씩 사위어 가고 있다
하늘의 거룩한 자여,
부도 위로 검은 나비 떼 날고 있는가
가을이 가고 겨울의
쇠 발굽소리 그 경계를 넘어올 때
나는 떠나리라
푸른 잠 속엔 누군가 있고
성성한 갈기를 휘날리는 백마 한 마리
덫에 걸린 내 잠의 둘레를 자꾸 뚜벅대고 있다
몰락하는 가을
한석호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날들의 저녁 창을 열면
무수히 많은 별들이
마음의 갈피마다 집을 짓고 있다.
하늘 가장자리서 뜯어온 들풀로 지붕을 엮고
그 들풀의 이슬들 꿰어
슬픔의 반대쪽 귀에 높이 걸어두는 것이다
태가 고운 바람이 불고
명상에 든 달맞이꽃의 그림자가
투명한 풍경소리에 제 어둠 묻는 시간이면
풀벌레 울음소리 더욱 환해진다
모두는 가을밤 가운데로 걸어 나와
고달팠던 걸음들 내려놓고 한없이 깊어 가는 것이다
그런 날은 책갈피 위에 불을 밝히고
찻물 끓는 소리가 툇마루 가득 흘러넘칠 때까지
어떤 흔적들 찾아 나선다
푸른 여우가 몰고 오는 달빛과
그 달빛에 부서지는 박쥐들 하얀 웃음소리 들려오는 곳으로
방직돌기를 굴려 나아간다
내 의식의 처마 끝을 잡고 있는 곳으로
거미줄 그렇게 던져 가는 것이다
별들이 지은 집 담장은 높지 않아서
오가고 싶은 것들은 모두 경계를 잊고 넘나들며
마음의 풍향계를 어루만지다 간다
그들은 소중했던 것들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번갈아 지우며 멀어져 간다
은빛구름, 소나기, 검은 우산
욕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야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풍경 속으로 묻히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날들의 새벽 창을 열면
핵을 감춘 무엇이 기다리고 있다
티벳 사자의 서 같은 화두를 던지며
사랑해야 할 날들의 저녁으로 돌아가라고
눈 부릅뜨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