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성
이상호
1
중국 여행길에 중국명주라는 술 한 병을 사왔다. 혼자 마시기 아까워 아끼고 아끼다가 어느 날 드디어 개봉하려는데 술병이 너무 가볍다. 귀에 가까이 대고 살살 흔들어보자 거의 빈 병이라는 느낌. 이리저리 병을 돌려가며 자세히 살펴보니 보일 듯 말 듯 실금이 갔다. 남은 술을 따르니 겨우 작은 잔 하나도 다 못 채운다. 그동안 실금 사이로 살금살금 알코올이 달아났던 것이다.
2
자궁을 빠져나오느라 내 몸에도 실금이 생겼는지
실금 사이로 조금씩 증발하는 알코올처럼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목숨
휘발성이 너무 강해
보이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
미리 따라볼 수도 없고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가 없어 더 궁금한
이상호 / 1954년 경북 상주 출생. 한양대 국문과, 동 대학원 및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82년 월간 《심상》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금환식』『그림자도 버리고』『시간의 자궁 속』『그리운 아버지』『웅덩이를 파다』『아니에요 아버지』『휘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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