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상림에서
마종기
경상남도 함양군 긴 숲길의 어디쯤 당나라 시대의 존경과 고관직을 버리고 망해 가던 조국에 돌아 온 최치원의 구름이 오늘은 잡목 사이에 서서 바람을 잡고 있네. 그 가을 상림의 따뜻한 흙길을 걸으며, 구절초 몇 무더기로 피어 난 그를 만나느니, 비단 옷 벗고 귀국한 연유를 아무리 물어도 냇물 소리 나는 쪽으로만 흰 손을 던지네.
오래 전 내가 남기고 떠난 숲과 길과 냇물이여 꽃 한번 피워 보기도 전에 가을이 무르익었으니, 탕진한 내 씨앗은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지나 온 시간의 날개들 쉬는 조촐한 곳에서 이제는 떠나고 싶은 도시 더 이상 없지만 떠돌이의 헌 거지가 되어 간곡하게 묻노니, 닳아지고 구겨진 내 어깨를 내릴 곳은 어디인가 상림의 시대를 밟고 도망 간 여인은 누구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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