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기형도
가라, 어느덧 황혼이다 살아 있음도 살아 있지 않음도 이제는 용서할 때
구름이여, 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 서럽지 않구나 어차피 우린 잠시 늦게 타다 푸시시 꺼질 몇 점 노을이었다
이제는 남은 햇빛 두어 폭마저 밤의 굵은 타래에 참혹히 감겨들고 곧 어둠 뒤편에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차가운 풀섶 위에 맑은 눈물 몇 잎을 뿌리면서 낙하하리라 그래도 바람은 불고 어둠 속에서 밤이슬 몇 알을 낚고 있는 흰 꽃들의 흔들림!
가라, 구름이여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이제는 어둠 속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 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 뜨면 아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우리는 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더미 속에 있다
29살 생일을 앞두고 쓸쓸히 생을 마감한 기형도 시인의 시입니다. 살아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죽어서 반열에 오른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요즘은 과연 죽어서 받는 평가가 무슨 소용이 있나? 이런 생각이 드네요. 그래도 부활의 희망 속에 잠든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지요? 가을이 가고 있습니다. 겨울 행복하게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치악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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