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나라
김정희
그가 서랍 깊숙이 말(言)을 감춰 두고 한밤중 속모를 소리 중얼거리며 가끔 웃으면
악보가 없는 허공에 대고 춤추는 음표를 보는지 그가 노래를 할 즈음
그의 눈빛이 제일 먼저 그 나라로 들어갔다.
눈동자가 바라보는 그 먼 곳을 찾으려고 뒤따라 뛰어가면 문은 굳게 닫혔다
그의 나라는 분노와 희열의 군주가 날마다 전쟁을 일으키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패배하고 승리하고 아무도 갈 수 없는 전선의 고지를 점령하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는 홀로 깃발을 꽂았다.
밋밋한 박음질로 둘둘 말려 올라 간 옷을 입고 휠체어에 묶여 있는 그는
장롱 속 몇 벌 때깔나는 양복을 입던 젊은 날을 생각나게 하고
그 화려한 날들이 어느 고지에 머물러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지친 병사가 지키는 그의 성을 우리는 그저 빙 둘러 선 채 구경할 뿐이다.
그의 나라엔 서리가 내리고 낙엽이 지고
아무도 살지 않는 그의 나라엔 흐릿한 겨울이 오고
누군가 대신하여 갈 수 없는 다리를 힘겹게 건너서 얼마나 남은 지 아무도 모르는 아버지의 나라
서서히 가라앉는 커다랗고 화려했던 왕국의 마지막을 바라보는지
그 바다 끝, 높은 언덕에 서서 열쇠를 심장에 꽂은 채 자신의 대문을 열려는지
회색 하늘 저녁 속에 잠기는
아버지
그 낯선 나라의 길을 우리는 울면서 걸어 나왔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전에 써 두었던 시를 다시 몇 줄 고쳤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는 긴 글을 써서 추모했는데, 아버지는 그저 옛시로 추모하다니..
오랜 병원 생활에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더 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편히 하셨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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