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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단의 4대 비극/이 승하 시인

by 키미~ 2010. 5. 15.

한국 문단의 4대 비극

                      이승하/ 시인


  제자 중에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이란 것을 받은 이가 있어 시집 출간을 알선하게 되었다. 유명 출판사의 사장님께 편지를 드렸으나 몇 주가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어 전화를 해보았다. 이런 말을 들려주는 것이 아닌가.
  "시내 대형 서점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서점마다 시집은 판매대 자체를 없애버렸습니다. 시집 코너가 다 사라진 지금 이 상태에서 시집을 출간하는 것은 바보짓이지요. 요즘 저희는 아동물 출간에 전력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닌게아니라 그 출판사에서는 다른 이름을 2개 더 등록하여 실용서와 아동물 출간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출판사를 인수한 사장님은 처음 몇 년 동안 시집과 시 평론집 출간에 열을 올렸으나 재미를 못 보았는지 어느새 '팔리는 책' 출간을 통해 생존을 모색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와 시 비평을 겸하고 있는 나로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서점에서 시집 판매대 자체가 다 사라져버렸다니. 이것이 현실이라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시집을 다년간 출간해온,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출판사에서 시집 출간 종수를 확 줄인 것도 어느덧 5, 6년이 되었다. 문학과지성사·문학동네·문학세계사·민음사·세계사·시와시학사·실천문학사·창비 같은 출판사에서 시집 출간 종수를 줄인 것은 시장의 논리를 따른 것일 터인데, 무슨 대안이 없는 것일까. 시집이 도무지 안 팔린다고 이런 출판사에서는 울상을 짓고 있지만 이른바 '베스트셀러 시집'은 불황을 모르니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일까. 지금 이 글을 읽고 여러분 가운데 류시화·서정윤·용혜원·원태연·이정하·이해인 같은 시인의 시집이 몇 판을 찍었는지 아신다면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다.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자랑하고 있다. 수십 쇄를 넘어 100쇄 넘긴 것이 수두룩하다. 이들이 내는 시집은 예외가 없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놀랍다.

1. 시인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시인의 수가 많은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문예지의 폭발적인 증가로 말미암아 해마다 엄청나게 많은 수의 시인이 배출되고 있는 것은 문제이다. 기본기를 충분히 닦고서 시인이 되지 않고 창작실기지도를 하는 사숙에 1, 2년 다니고서 시인이 되려고 애를 쓰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시인이 된다. 너도나도 쉽게 시인이 되다 보니 고급독자층이 무너지고 아마추어 수준의 시인들이 시인 행세를 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땅 시인들의 쓸데없는 난해함은 시집 독자의 외면을 사게 된 주범이 아닐까. 시인 자신도 뜻을 알고 썼을까 하는 시들이 문예지마다 넘쳐난다. 독자에게 무엇을 말해주고자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독백에 가까운, 자기 고백적인, 혹은 유아독존적·자가당착적인 시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래서 시집 판매의 주고객이라는 청소년층과 대학생층, 그리고 직장여성층은 정통문학권 출판사에서 내는 시집을 읽는 것을 '마침내' 포기한 것이 아닐까.
시의 다른 이름이 운문인데 이 땅의 시들이 산문화로 치닫고 있고, 한편으로는 너무 길어진 것도 한 원인일 수 있다. 같은 산문시라도 정진규 같은 분의 시에는 내재율이 있어 겉모습만 산문일 뿐 엄밀히 말해 운문이요 시이다. 그런데 요즈음 많은 시인들이 운율을 버리고 산문을 취하고 있다. (베스트셀러 시집의 특징 중 하나는 산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사 외양은 운문 같을지라도 여러 행 계속 이어진 문장이라 산문과 진배없는 시들도 많다. 기성시인들의 시가 이렇다 보니 백일장에 오는 고등학생들조차 태반이 시를 산문조로 쓰고 있다. 그래서 줄글로 쓰지 말고 행과 연을 적절히 나눠 운문형식으로 써달라고 따로 당부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2. 문예지에는 문제가 없는가

웬만한 문학단체마다, 지방 대도시마다 문예지 안 내는 곳이 없어 이제 문예지는 춘추전국의 시대로 돌입하였다. 국민 총수와 문인 총수에 비겨 이렇게 많은 문학잡지가 출간되는 나라가 세계에 또 있을까? 문예지의 수가 많다 보니 거기 실리는 작품들의 수준에 참으로 문제가 많다. 또한 세력 확보를 위해 신인을 뽑지 않을 수 없으니, 충분한 습작기를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신인상을 받으며 시단에 나온다. 예전 같으면 시인 지망생으로서 꾸준히 시집을 사보며 절차탁마 습작을 하고 있을 사람들이 시인이 되었으므로 남의 시를 감상하며 연구하지 않고 자신의 시를 발표하고 있다. 정직한 문예지라면 '신인상 수상작 없음'이라는 사고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어떤 문예지는 신인을 내보내면서 책 구입을 강요하여 문제가 된 적도 있는데, 재정상태가 열악한 일부 문예지의 횡포일 테니 이 자리에서는 거론하지 않겠다. 수준이 영 안 되는 기성시인의 작품을 되돌려보내는 횡포는 부려도 좋을 것이다. 그런 것을 문예지 제작의 방침으로 삼는 문예지가 있으면 좋겠다. 또한 안면을 배제하고 공정한 시각으로 시인을 선별하여 작품을 청탁하고, 엄정한 신인 배출과 문학상 시상으로 이미지를 잘 가꾸는 문예지가 좀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어차피 문예지가 잘 팔리지 않는 상황에서야 정직성을 내세우지 않는다면 무엇 하러 문예지를 만든단 말인가.
  문예지의 또 다른 문제점은 논점이 없거나 논쟁이 없다는 것이다. 월간 {현대문학}이 한때 '죽비소리'라는 코너를 마련해 화제작이나 유명 문인의 신작에 대해 죽비를 내려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반박의 목소리를 두려워해 익명으로 글을 올림으로써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무렵에 "문예지에서 읽을 만한 글은 {현대문학}의 '죽비소리'밖에 없어"라는 말을 여러 사람한테서 들었다. 그만큼 우리 문단에서는 '사심 없는 비판'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문학적 경향이나 이념이 다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대담을 가지면 좋은 방안이 나올 수도 있을 텐데……. 지나친 욕심일까? 오래 전 {문예중앙}에서는 김정환과 이인성의 대담을 실었는데, 대단히 신선한 느낌을 받았었다. 아직도 상호 존중을 전제로 한 두 분의 화려한(?) 설전이 잊혀지지 않는다.

3. 문학평론가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나 자신 간간이 비평류의 글을 쓰고 있기에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이겠지만 문학평론가들도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다. 문학평론가들은 대개 다소간의 권력을 지니고 있다. 가령 어느 문예지에서 특집으로 '9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 10인의 시 세계'란 것을 마련했고, 어느 문학평론가가 그 일에 관여했다면 그는 분명히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의 권력은 신인 등용과 문학상 심사에 관여하면서도 나타나지만 작품 청탁을 하거나 특집을 정하는 일, 시집 출간을 결정짓거나 각종 평문을 쓸 때도 나타난다.

  첫 번째 문제는 '식구 의식'에 대한 것이다. 내가 활동의 무대로 삼고 있는 문예지 혹은 문학단체의 일원이 아니면 작품을 읽지도 않고 논하지도 않는 문학평론가들이 있다. 달리 말해 '우리 식구'이면 작품의 수준에 대해 양심적으로 논하지 않고, 대개의 경우 칭찬을 일삼는다. 해설이나 서평은 애당초 한계를 지닌 글이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사사건건 우리 식구만을 감싸고도는 비평적 행위가 만연해 있다. 그래서 '주례비평'이니 '골목비평'이니 하는 욕을 먹고 있지 않은지.

  두 번째 문제는 권력을 가진 문학평론가들이 사실상 두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대학에 몸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겁이 많다. 그 한 예가 유명 문인의 태작에 대해 비판을 하면 불이익을 당할까봐 아예 입을 봉하고 있는 것이다. 몇 개월 전, 장석주 씨가 김춘수의 시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쓴 것을 읽었는데 솔직히 큰 감동을 받았다. 재야에 있는 분이어서 그런 용기를 발휘한 것일까, 오랜만에 가슴이 다 후련해지는 글을 읽었다.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시와 삶은 따로 가지 않는다. 그것은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두 가지이다. 김춘수의 백일몽에서 나온 이미지들이 머금고 있는 의미들은 심약함, 패배주의, 소외, 존재의 고독, 불안, 자기분열이다. 김춘수는 자신의 뜻없는 말놀이들의 시들을 두고 '무의미 시'라고 명명하지만, 그것은 타자와의 소통이 차단된 자의식에 갇혀버린 자의 자기분열과 심약함을 드러내는 기표에 지나지 않는다.
  김춘수의 언어들은 실재의 세계로부터 끝없이 도피하는 언어, 그 내부로부터 의미를 지워감으로써 현실에 대해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상상적 유희로 환원해버리는 비본래적인 언롱(言弄)의 세계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김춘수의 시에서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하며, 그를 이미지 조형술의 천재, 혹은 수사의 달인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지언정 감히 큰 시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언롱의 한계와 파탄], {시경}(2004. 상반기)에서

  와병중이신 시인에게는 외람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글을 읽고 내심 '옳은 말씀이로고' 라며 쾌재를 불렀다. 대가일지라도 명작만을 쓸 수는 없다. 대가이기에 양지만을 골라서 걸어온 문인이 있다면 작품의 음영을 따지는 문학평론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문학은 발전할 수 있다. 장석주 씨 같은 용기 있는 평론가가 이 땅에는 불행히도 많지 않다.

  젊은 문학평론가 최현식 씨는 계간 {파라 21} 여름호에 발표한 [질문의 실종과 포에지의 응고]라는 글에서 한국 현대 시단에서 각광받고 있는 최승호·안도현·김용택·고재종의 최근 시들을 '현실을 회피하는 신비주의'라는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이 글을 시인 당사자가 읽었다면 기분이 나빴겠지만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을 것이다. 최현식의 말마따나 "시인의 시적 직관과 통찰이 상투화·범속화되고" 있는 이 때, 그것을 지적하는 용기 있는 발언은 시인이 정신을 차리는 데 일조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세 번째 문제는 두 번째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문예지 혹은 출판사라는 더욱 큰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문학평론가가 갖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문학평론가가 많이 나와야 한다. 기댈 언덕, 혹은 비빌 언덕에 대해 너무 골똘히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유명 출판사에서 문학평론집을 못 냈다고 하여 누가 그를 멸시하는가? 천하를 호령하던 조연현의 평론을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읽고 있단 말인가. 문학평론가가 권력을 두려워하거나 권력에 아첨하면 상갓집의 개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

4. 독자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고급독자나 문학애호가들이 튼튼한 층을 이루고 있지 않고 너나없이 시인이며 소설가, 수필가가 되어 글을 쓰고 있다. 스스로 글을 쓰려고 들지 남의 글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읽고 연구하고 공부하지 않고 잽싸게 쓴 글로 재빨리 인정받으려 한다.
  독자들은 또한 아픔과 슬픔의 세계를 굳이 외면하고 기쁨과 즐거움의 세계를 찾으려 든다. 딱딱하면 배격하고 심각하면 외면한다. 시건 소설이건 베스트셀러의 경우, 인생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짧은 즐거움과 위안을 제공한다. 혹은 최루성을 띠기도 한다. 독자층이 있기는 있되 PC통신문학과 환타지소설에 열광한다. 좋은 작품을 좋다고 하고 나쁜 작품을 싫다고 하는 양식 있는 독자층이 없다면 정통문학의 앞날을 결코 밝을 수 없다.
  대학로에 가서 놀란 것이 있다. 장식품이며 선물용 물건을 파는 가게가 곳곳에 눈에 뜨이고 액세서리를 파는 행상도 즐비한데 서점은 도무지 눈에 안 뜨인다는 것이었다. 그런 가게마다 사람들이 빼곡한데 어느 한 서점에 갔더니 사람이 한두 명만 있었다. 독자는 어디로 갔는가? 독자는 다 사라져버렸는가?

  한국 문단의 4대 비극을 더 이상 보게 되지 않기를 갈망하지만……. 나는 시인이면서 문예지 편집에 관여하고 있고, 문학평론 유의 글도 간간이 쓰고 있고, 또한 문학 독자이기도 하다. 이 모든 비극적 진단에서 나만은 그렇지 않다고, 나만은 독야청청하다고 변명하고 싶지 않다. 이 모든 것을 껴안고서 좀더 나은 문단 풍토, 문학 풍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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