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 도둑
김정희
오래 전, 나의 할아버지가 어린 날 붙들고는 이런저런 말씀 하시다가,
니 애비는 도둑이다. 하더이다.
연유를 물어보니, 어느 볕 좋은 가을날,
추수한 논에 쌀알이라도 주워 볼까 어정거리고 있었는데,
깨밭의 도리깨질 하던 젊은 아버지의 힘찬 팔뚝이 펄떡거리며 가을날을 어지럽히고 있더라는 것이요,
그걸 바라보며, 키질하던 나의 어머니가 쌩긋이 웃으며 말똥말똥 아버지를 연하게 쳐다보고 있더라는 것이라,
그거로는 도둑의 까닭을 밝힐 수 없다고 내가 성화대니,
할아버지 빙긋이 웃으며, 니 애비는 깨 도둑이여, 그러고는 둘이 없어졌어야,
그러고 니가 태어났응께, 긍게 니 얼굴을 봐라,
니 얼굴이 깨 천지여! 퍼부었당께.
할아버지 이빨 빠진 입 오물거리며 헹헹 웃더이다.
그래서 내가 대들었지.
그럼, 아부지를 낳은 할아버지는 뭐당가요?
할아버지 성근 수염 어루만지며 다시 힝! 하고 말처럼 웃으시더니,
나는 깨 도둑은 아녀, 니 애비가 수수하게 생겼응께, 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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