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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민박 , 이상국

by 키미~ 2014. 5. 11.

사흘 민박 외 2편 

 

  이상국

 

 

 

무청을 엮던 주인이 굳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해서

시 만드는 사람이라고 일러주었으나

노는 가을 며칠을 거저 내주지는 않았다

세상의 시가 그러하듯 오늘도

나 같은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주인 내외는 근사하게 차려입고

읍내로 잔치 보러가고 나는

지게처럼 담벼락에 기대어

지나가는 가을을 바라보았다

나보다 나를 잘 아는 건 없었으나

별로 해준 게 없었다

돌아가면 이 길로 지구를 붙잡아매던가

아이를 하나 더 낳았으면 좋겠다

스승은 늘 분노하라 했으나 때로는

혼자서도 놀기 좋은 날이 있어

오늘은 종일 나를 위로하며 지냈다

이윽고 어디선가 시커먼 저녁이 와서

그 쪽으로 물오리들 폭탄처럼 날아간 뒤

나는 라면에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땀을 흘리며 먹었다

 

 

자비에 대하여

 

   

스페인 축구클럽 레알 마드리드가

세비야에게 골을 자꾸 넣으니까

해설자는 보기 안됐던지

마드리드에게 자비가 없다고 한다

인간이 지어낸 말이긴 하나 나는

수천 년 마음의 일이었던 자비가 그렇게

격렬한 육체의 일에 까지 관여할 줄 몰랐다

얼마 전 한국의 중구청 공무원들이

쌍용차 대한문 농성장을 철거하고

화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꽃들이 얼마나 좋아 했을까

노동자들의 자비다

자비는 본시 용서나 슬픔의 어머니였는데

지금은 지구상에 거처할 데가 별로 없다

나는 누구에게 자비를 구한 적이 없거니와

감히 그것을 써 본 일도 없다

그래서 언젠가 기회가 주어지면 나도

고작 죽은 말이나 따라 다니는 시인을 내버리고

박지성이 활약했던 멘체스터 유나이티드 쯤에서

무자비하게 뛰어보고 싶다

 

   

미시령

 

    

영을 넘으면 동해가 보이고

그 바닷가에 나의 옛집이 있다 

 

나도 더러 대처에서 보란 듯이 살고 싶다

   

그러나 바다가 섭섭해 할까 봐

눈 오는 날에도 산을 넘고

어떤 날은 달밤에도 넘는다

   

속으로 서울 같은 건 복잡해서

거저 준대도 못 산다며

한사코 영을 넘는 것이다

   

바다도 더러 울고 싶은 날이 있는데

내가 없으면 그 짐승 같은 슬픔을 누가 거두겠냐며

시키지 않은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동해는

네가 얼마나 심심하면 그러겠냐며

남모르게 곁을 주고는 하는데

 

사실 나는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바람이나 나무뿌리에 묻어둔 채 영을 넘고는 한다

 

 

                       —《불교문예》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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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동해별곡』『내일로 가는 소』『우리는 읍으로 간다』『집은 아직 따뜻하다』『어느 농사꾼의 별에서』『뿔을 적시며』, 시선집『국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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