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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이성복

by 키미~ 2014. 6. 3.

 

 

봄날

 

이성복

 

1

 

어떤 저녁은 식육식당 생철대문 앞 보도블록 사이에 하얗게 피어 있었다 나는 바람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저녁은 소스라치며 떨고 있었다 나는 또 스쳐가는 내 발걸음에 깨알 같은 그것들이 으스러지고 말 것 같아, 잠시 멈춰섰다 아무도 찾는 이 없고 아무도 전화하지 않는 예순 넘은 봄날 저녁이었다

 

2

 

어느 날이었는지 몰라 그리움이 그냥 가렵기만 해서 집을 나섰어 안 되는 줄 알았지만 그리움이 보채기만 해서 자꾸 달래주었어 얘야, 네가 이러면 난 많이 힘들단다 알아, 나도 알아, 여러 날 네가 먹지 못햇다는 걸, 마시지 못했다는 걸 봐, 보라니까 내가 너한테 해줄 게 없다는 걸 어느 날이었는지 몰라 풀 비린내 진동하는 방뚝에서 그리움을 떼내버리고 혼자 돌아왔어 알아, 나도 알아, 네가 많이 힘들다는 걸

 

3

 

한 사내가 깊이 담배를 빨아당겨도 봄은 가지 않는다 봐라, 임대아파트 앞에서 어정거리는 노인들과 딱지 치는 아이들은 잠시 후면 지나갈 테지만 봄은 가지 않는다 아직 목련은 덜 피었고 개나리도 한창이 아니다 한 사내가 폐 속 허파꽈리 하나하나가 펑펑 터지도록 담배를 깊이 빨아당겨도 봄은 가지 않는다 봄은 아직 오지 않은 것, 영영 오지 않을 것 사내는 저 혼자 중얼거린다 저 꽃들이 저만큼만 피고, 더는 피지 않았으면, 저도 몰래 그냥 져버렸으면.......아흔 넘은 그의 어머니는 몇 년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는 찾아가보지도 않고 덜 핀 목련처럼, 덜 핀 개나리처럼 바라만 보고 있다 엄마한테는 안 갈 거야......한 사내가 필터 앞까지 타들어온 담배를 어떻게 꺼야 좋을지 모를 때, 길가에선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폐지 가득 실린 리어카 타이어에선 바람이 새고, 사내의 손에서 담배 필터가 다 녹도록 봄은 가지 않는다

 

 

 

이성복, 1952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 불문과와 동대학원 졸업,

 1977년 <문학과 지성>에 시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여 등단,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남해 금산><그 여름의 끝><아, 입이 없는 것들>등이 있다.

 

*위의 시에서 마침표가 없고 가끔 쉼표만 있는 것은 시인의 의도적인 의식의 표출이므로 혹시 시를 옮기실 때는 유의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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