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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상희구 석류 / 상희구 아무래도 전생에 치과의사가 저이 아부지였나보다 어쩌면 "이박음"이 이리도 촘촘할까 이 작고도 견고한 질서, 내가 만약 빼어난 과학자였더라면 요 촘촘한 것들의 줄기세포만 몽땅 뽑아서 시골 꼬부랑 할망구 허물허물한 이빨들 씨그리 고쳐놓으리 현대시학 (2006년 5월호).. 2012. 5. 11.
오늘은 장날 오늘은 장날 김정희 물 먹은 삼월 눈 쯤이야 젊은 놈 비웃으며 눈삽 찔러 넣다 허리 나갔다고 한번 간 허리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오줌 눌 때마다 오금이 저린다고 침 맞으러 간다면서 펄펄 날아가네 한번 가면 안 오는 게 허리뿐이랴 젊어서 품은 계집 버릴 줄 몰라 한 세월 다 보내고 허리까지 주고 왔네 쌍가마 뒤통수 눈 흘기며, 욕바가지 퍼붓는 철 늦은 눈 내리는 오늘은 장날 마을버스 뒷자리에 걸터앉아 눈가 주름 감추고 약장수 구경이나 갈거나, 둥둥거리는 북소리에 맞춰 춤이나 덩실 출거나, 눈 내리는 장터 선술집에서 늙은 주모 푸념에 주머니 털어내는 눈송이 벚꽃처럼 휘날리는 설익은 봄, 오늘은 장날. 2012. 3. 24.
고로쇠 나무, 마경덕 고로쇠나무 마경덕 백운산에서 만난 고목 한 그루, 밑둥에 큼직한 물통 하나 차고 있었다. 물통을 반쯤 채우다 말고 물관 깊숙이 박힌 풀라스틱 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둥치에 구멍을 뚫고 수액을 받던 자리, 시름시름 잎이 지고 발치의 어린 순들, 마른 잎을 끌어다 푸른 발등을.. 2012. 3. 15.
아내, 공광규 아내 - 공광규 아내를 들어 올리는데 마른 풀단처럼 가볍다 수컷인 내가 여기저기 사냥터로 끌고 다녔고 새끼 두 마리가 몸을 찢고 나와 꿰맨 적이 있다 먹이를 구하다가 지치고 병든 컹컹 우는 암사자를 업고 병원으로 뛰는데 누가 속을 파먹었는지 헌 가죽부대처럼 가볍다. 2012. 3. 7.
해안선, 황학주 해안선 (외 1편) 황학주 낮달의 입술이 바다의 쇄골에 살짝 붙었다 떨어진 듯이 뱃고동 위에 떠 있다 깊숙이 손목을 집어넣고 줄을 튕기는 산호해변을 덮은 여름 기타 하나가 울어대다 노래하다 쇄골 밑이 점점점 어두워져 오다 가만 보니 해안선은 이럴 때 자라는 듯 어두워지는 것들이 .. 2012. 3. 7.
봄, 이성부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 2012. 3. 2.
눈물 눈물 어머니의 눈 속엔 바다가 있다 어머니는 눈 속에 푸른 파도를 숨겨 놓고 잠 안 오는 밤이면 몰래 꺼내서 마시고 있다 물결 뒤적이며 낚아 올리는 은빛 갈치 바람에 흰 머리 날리며 열 길 바다 속마음을 한 눈에 알아채는 어머니의 아버지 커다란 고무 물 옷 추켜올리며 개펄을 다독여.. 2012. 3. 1.
비망록, 김경미 83년 신춘문예 당선작 / 김경미 / 중앙일보 비망록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 보니 스물 네 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 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他人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 2012. 2. 25.
먼 곳 외 2 편, 문태준 먼 곳 (외 2편) 문태준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 움큼, 한 움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 2012. 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