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260 재봉, 김종철 사시사철 눈 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에는 집집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을의 하늘과 아이들이 쉬고 있다. 마른 가지의 난동(暖冬)의 빨간 열매가 수실로 뜨이는 눈 내린 이 겨울날 나무들은 신(神)의 아내들이 찐 은빛의 털옷을 입고 저마다 깊은 내.. 2012. 1. 13. 수평선이라는 직선, 송재학 수평선이라는 직선 송재학 수평선의 직선은 표정이 좋다 곧장 아침에 일어나서 지평선 시렁 위에 반듯이 개어 쌍 희(囍)자가 보이도록 올렸더니 구름처럼 가볍다 그렇다면 수평선 위에 속셈이 깊은 다락도 있겠군 지난여름에 보아 둔 물웅덩이를 시계와 함께 다락에 옮겼다 어김.. 2012. 1. 4. 미루나무 연가, 고재종 미루나무 연가 고재종(1957~ ) 저 미루나무 바람에 물살쳐선 난 어쩌나, 앞들에선 치자꽃 향기. 저 이파리 이파리들 햇빛에 은구슬 튀겨선 난 무슨 말 하나, 뒷산에선 꾀꼬리 소리. 저 은구슬만큼 많은 속엣말 하나 못 꺼내고 저 설렘으로만 온통 설레며 난 차마 어쩌나 강물 위엔 은.. 2012. 1. 2. 산목련 산목련 김정희 남쪽에서 태어나 남쪽으로 시집가서 남쪽에만 살던 친정어머니 가르릉 천식기침 전화로 옮길까 귀에서 떼던 싸가지 없는 맏딸이 산목련 꽃대가리 다섯 개 따서 봄 산에 취해서는 펄떡거리다 봉오리 삭을 때 겨우 부쳤네 어머니 그 꽃 보고 생전에 첨 보네, 이래 예.. 2012. 1. 2. 별 만드는 나무들, 이상국 별 만드는 나무들 이상국 (1946∼) 설악산 수렴동 들어가면 별 만드는 나무들이 있다 단풍나무에서는 단풍별이 떡갈나무에선 떡갈나무 이파리만한 별이 올라가 어떤 별은 삶처럼 빛나고 또 어떤 별은 죽음처럼 반짝이다가 생을 마치고 떨어지면 나무들이 그 별을 다시 받아내는데 .. 2012. 1. 2. 흔들릴 때마다 한 잔, 감태준 흔들릴 때마다 한 잔 감태준 (1947~) 포장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한 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살아 있는 참.. 2012. 1. 2. 그늘들의 초상, 최호빈 2012년 <경향 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늘들의 초상 최호빈 외팔이 악사가 기타를 연주하는 하얀 레코드판 위로 한 아이가 돌면 걸음마다 붉은 장미가 피어난다 오선지에 적힌 외팔이의 과거를 한 페이지씩 뒤로 넘기면 검게 변해버리는 장미, 같은 자리를 다시 지날 때 멈.. 2012. 1. 2. 일월 일월 김정희 밤의 구석을 후벼 끄트머리 들춰보면 작은 틈새로 새 한 마리 비비적대며 들어와 남루한 12월의 이마에 생채기를 남긴다 어둠은 푸른 기차와 함께 떠나려나 간이역 의자에 앉은 바람에게 묻노니 오늘 너의 겨드랑이에 작은 깃털 하나 피어나고 묵은 날개 뿌리 채 뽑혀.. 2012. 1. 2. 고독한 물고기들의 산책/강인한 고독한 물고기들의 산책 강인한 아침저녁 강변을 걷는다는 건 물고기로 사는 일 물고기가 되어 저 푸른 상공을 헤엄치는 일. 가만가만 지느러밀 휘젓거나 불끈 쥔 주먹을 니은자로 코앞에 들어올리며 계절을 느끼는 일 등 뒤의 두런거리는 소리는 티끌처럼 날린다. 하루에도 몇 .. 2011. 12. 28. 이전 1 ··· 11 12 13 14 15 16 17 ··· 2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