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260 사이 사이 김 정 희 울타리 양 쪽의 찔레와 장미 만나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깐에는 손을 뻗쳐도 조금 사이가 빈다. 모자라는 부분을 채우느라 봄이면 분주하고 눈바람 치면 감싸 안기도 하드만 다투어 피느라 서로를 밀어내고 가시를 곧추 세우며 눈을 흘긴다. 몸은 따로 있어도 꽃은 꽃일 .. 2013. 4. 12. 감자를 심다 감자를 심다 김정희 부활절 아침에 감자를 심다. 쪼글쪼글한 몰골에 눈(目)은 여러 개, 세상에 나고 싶었던 눈구멍들은 한 줌 흙에 파묻히고, 어둠에 숨어 있는 것들도 부활을 꿈꾸나? 호미에 거치적거리는 고랑에 던져진 작은 눈들, 그들이 꿈꾸는 아침은 감자밭 둑에 쌓인다. 골고다 언.. 2013. 4. 1. 사월에 걸려온 전화, 정일근 사월에 걸려온 전화 정일근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 2013. 3. 26. 오래 된 꽃구경 오래 된 꽃구경 김정희 해마다 사월이 오면 철없는 벚꽃이 피기도 전에 들판에 검정 고랑 만들던 노인네들 새벽부터 마을회관 앞마당에 모여 꽃놀이 간다고 성화댑니다 관광버스 꺼진 의자에 오래된 허리 얼버무리며 입술엔 사흘 동안 지워지지 않는다는 그 유명한 양키시장 빨강 립스.. 2013. 3. 19. 낯선 봄날 낯선 봄날 김정희 마을버스 뒷자리 기대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니 치악재 정류장에 아는 여인 하나 햇살에 눈 찌푸리고 번호판을 유심히 바라본다 버스는 떠나는데 누구를 기다리나 시큰해진 기억에 눈을 돌리면 평생 차라고는 가져본 일 없는 노인네들 농사일, 자식일 이빨 빠진 입으로 .. 2013. 2. 20. 오늘은 장날 오늘은 장날 김정희 물 먹은 삼월 눈쯤이야, 젊은 놈 비웃으며 눈삽 찔러넣다 허리 나갔다고 한번 간 허리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오줌 눌 때마다 오금이 저린다고, 침 맞으러 간다면서 펄펄 날아가네. 한번 가면 안 오는 게 허리뿐이랴, 젊어서 품은 계집 버릴 줄 몰라 한 세월 다 보내고 허.. 2013. 1. 21. 설야, 김광균. 설 야 (雪夜)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자췬양 흰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홀로 밤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女人)의 옷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 2013. 1. 14. 녹번동, 이해존(2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2013년 경향신문신춘문예당선 시/ 이해존 녹번동 1 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근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구멍도 막아 놓았다 네모를 그려 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 2013. 1. 3. 쏘가리, 호랑이, 이정훈(한국일보신춘문예2013 당선작) 201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쏘가리, 호랑이 이정훈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범이 되고 싶었던 큰아버지는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아 집으로 돌아오진 못하고 병창[i] 아래 엎드려 있는 거라고 할애비는 밤마다 마당귀를 단단히 여.. 2013. 1. 1. 이전 1 ··· 6 7 8 9 10 11 12 ··· 2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