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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아침 사순절 아침 김정희 안개가 햇빛을 삼킨 봄날 꽃이 흘린 눈물 비린내가 난다. 아침을 울리던 침묵의 행진은 광야를 지나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고, 오후가 웅크린 채 꽃의 눈물을 줍는다. 언제 이 비루한 어둠을 걷어낼 것인가, 눈과 귀를 찢은 입의 십자가를 내릴 것인가, 검은 숲에 갇힌 .. 2014. 4. 16.
봄날이 가네 봄날이 가네 김정희 봄이 그리 쉽게 옵디까? 꽃 잔치 벌어졌다 난리를 쳐도 한 번의 바람에 자지러져 흩어지고, 사월 눈보라 사정없이 몰아치던 간밤을 생각해 보시구랴. 헐어 구멍 드러낸 아스팔트 위 나자빠진 꽃잎에 마음 상한 여인아 비워 둔 가슴 한켠 젊음을 심어 놓고 봄만 오면 벌.. 2014. 4. 4.
절룩이는 봄날 절룩이는 봄날 김정희 생강나무꽃 황사에 찌들어 부옇게 떠 있는 날 머리에 흰 띠 두른 마을 아낙 절룩이며 회관으로 간다. 봄날의 마을회관은 온통 절룩인다 무릎 관절 허리 뼈 발목 손목 삐걱거리는 봄날 냉이도 절룩 쑥도 절룩 씀바귀 절룩이다 쓰러지는, 바람도 절룩절룩 먼지 절룩 .. 2014. 4. 3.
우수 雨水 우 수 雨 水 김 정 희 사흘 밤낮 내린 눈(雪)이 죽령에 자리잡고 소백산 절 마당엔 노루가 내려왔다 눈이야 봄이 오면 떠난다지만 동자승 푸성귀에 마음 들인 노루는 절집이 지 집인 양 눌러 앉았다. 대처에 두고 온 연못을 못 비우고, 새벽 예불 시간이면 조불 졸던 공양주보살 고드름 햇.. 2014. 2. 15.
우리 마을 우리 마을 김정희 노인네 하나쯤 사라진다고 세상이 뒤집어 지진 않더라고, 마을 입구 백년 된 은행나무가 일러 주던데요. 개울 건너 자식이 지어 준 기와 멋들어진 집에 고려장 사는 사시사철 털모자 쓴 할머니 돌밭 일구고, 아들 며느리 온다고 마루 반짝반짝 닦던 그니. 어느 봄볕 좋던.. 2014. 2. 8.
대설 大雪 대 설 (大 雪) 김정희 눈이 옴팡지게 쏟아지는 날. 생솔 넣어 눈 매운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아 쪼글한 얼굴을 노골노골 녹이던 치매 걸린 동배 영감 뾰족 구두 신고 나들이 가는 작은 마누라 보더니, 부지깽이 치켜들고 새 옷 입은 등짝을 후려갈기네. 펄펄 날던 젊은 날에 뒷방 신세 된 큰 .. 2014. 1. 20.
폭설, 오탁번 폭설(暴雪)/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 2014. 1. 20.
오늘도 무사히 오늘도 무사히 김정희 겨울이 오면 남편은 일이 없다. 그가 돌아오는 어스름 저녁이면 강 건너 어두워진 산이 거대한 이무기처럼 휘어져 눕는다. 산처럼 길도 눕는다. 휘어져 누운 길을 등에다 지고 오늘도 공쳤네, 왼쪽 닳은 신발을 털썩거리며 그가 돌아올 때, 내려앉은 어깨 뒤로 해는 .. 2014. 1. 7.
소설 小雪 소설 小雪 김정희 한밤중 바람이 창을 두드릴 때 어쩐지 네가 올 것 같아서, 떠나지 않는 바람 등 떠밀어 보내고 달빛으로 내 방을 밝혀두었지. 그리움에 지친 날 몰래 엿보았더냐? 달빛이 지 몸을 아랫목에 뉘이고서야, 이리도 애달픈 네가 온 줄 알았더니. 내가 보낸 그 바람 뒤에 너는 .. 2013. 1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