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260 겨울, 초입 겨울, 초입 겨울 햇살 비치는 아스팔트위로 지팡이 짚고 다리 절룩거리며 할아버지 지나가신다 할아버지 눈을 씰룩거리며 짖어대는 개들 본다. 개들은 악을 쓰며 짖다가 주인이 보나 안보나 짖다가 지들끼리 똥꼬 냄새를 맡다가 또 짖는다 개들 소리는 하늘로 날아가 바람개비를 간질인.. 2016. 9. 7. 중복 中伏 중 복 (中 伏) 김 정희 염천 밭을 갈던 태양이 삼태기로 뭉게구름 여기저기 발겨 놓은 채, 물 한 동이 획 쏟으면, 느티나무 그늘 밑에 낮잠 자던 홀아비 동춘이 후드둑 소리에 한걸음에 냅다 달려 홑이불 걷어 낸다. 개장사 한차례 휭 돌고 간 뒤, 강아지 복길이 자는 척하고 흑염소 수풀 속.. 2016. 7. 8. 햇빛 쪼개기 햇빛 쪼개기 김정희 미립자가 모여서 물체를 형성한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모든 인간들이 물체로 보이기 시작했다 혹은, 쪼개기 시작했다 햇빛이 포도알갱이마다 입자를 밀어 넣으며 몸부림치는 한여름 오후 두 팔을 벌린 채 사그라지는 날들을 움켜쥔 아버지의 코에 식량을 나르는 고무튜브 혹은 묶인 두 다리의 각질들이 지탱하는 저 입 벌린 시커먼 구멍들 쪼개본다 쪼개본다 더 작게 더 작게 혹은 뭉쳐본다 입자를 뭉쳐서 물체를 만들어본다 그걸 알기 전부터 살아 온 많은 물체들이 여름에 먼 길 떠나고 있다 햇빛을 잘게 쪼개고 있다. 2016. 7. 8. 해바라기 해바라기 김정희 그들이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동안만 해는 동쪽에서 뜬다 노란 꽃잎이 하나 둘씩 오그라들고 말라가는 서쪽의 들 서쪽의 들에 선 해바라기들은 늘 외롭다 그리움이 많아질수록 그들의 고개는 더 이상 햇빛을 따라가지 않는다. 해가 뜨는 동쪽 그들의 나라엔 돌아.. 2016. 7. 8. 불의 고리 불의 고리 김정희 누군가 불붙은 긴 끈을 잡고 줄넘기를 하나 어어! 한 쪽 끝이 꿀렁하더니 바다에 불이 붙었다. 불붙은 꼬리가 북극 볼따구 후려치는 꼴 보소. 큼지막한 얼음 위에 처연하게 걸터앉은 저 백색의 곰 면상을 보소. 아스팔트는 꺼지고 산은 무너져 섬에 갇힌 사람들이 두 팔.. 2016. 4. 17. 시 파는 사람, 이상국 시 파는 사람 / 이상국 젊어서는 몸을 팔았으나 나도 쓸데없이 나이를 먹는 데다 근력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 요즘은 시를 내다 판다 그런데 내 시라는 게 또 촌스러워서 일 년에 열 편쯤 팔면 잘 판다 그것도 더러는 외상이어서 아내는 공공근로나 다니는 게 낫다고 하지만 사람이란 저.. 2016. 3. 10.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 김정희 그가 서랍 깊숙이 말(言)을 감춰 두고 한밤중 속모를 소리 중얼거리며 가끔 웃으면 악보가 없는 허공에 대고 춤추는 음표를 보는지 그가 노래를 할 즈음 그의 눈빛이 제일 먼저 그 나라로 들어갔다. 눈동자가 바라보는 그 먼 곳을 찾으려고 뒤따라 뛰어가면 문은 굳.. 2016. 1. 19. 빈 집 빈 집 김 정 희 병원에 돈 주다가 볼 일 다 본다던 뒷집 할머니 사흘 전 버스에 앉아 어딜 그리 다니냐고 인사를 건네더니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다네. 가방 가득 아들 위한 주전부리 나르시고 구순이 가까워도 메주를 쑤시더니, 김장 다 해 놓으시고 눈 감으셨다. 가는 길은 똑같다고 혼자 .. 2015. 11. 18. 청춘/심보선 청춘/심 보 선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 2015. 11. 4. 이전 1 2 3 4 5 6 7 ··· 2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