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260 나팔꽃 나팔꽃 김정희 보라색 조동이 앙다문 채 기다리는 장마 시작된 촌 집 마당. 비는 실로폰처럼 슬레이트 지붕 위로 통! 통! 통! 음표 한 개에 꽃잎 하나씩 벌어지는 나팔소리 우렁찹니다. 2014. 7. 29. 잠들다 잠들다 김정희 빗장을 걸고, 죽음의 방문을 여는 시간 밤 열한 시 눈을 감은 채 벽을 더듬다 노래를 불러 줘 휘파람을 불어 줘 온 종일 내 멱살을 쥐고 흔들던 오랜 나의 형제 비로 얼룩진 벽을 타고 세월을 덮은 거미와 같이 어두운 너에게 내 온 몸을 맡기마 밤 열한 시의 옆구리에 구멍.. 2014. 7. 13. 저녁 저녁 김정희 해를 다 먹은 오후가 달 속으로 첨벙 뛰어들면 달 한켠 모여 살던 별들이 와사사 부서지네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어둠을 향해 커다랗게 입을 벌리면 달은 텅 빈 채 하늘을 떠다니고, 내 가슴속엔 별들이 산다. 2014. 7. 13. 놓치다 놓치다 김정희 핏줄이 불거진 손등을 주사 뺄 때마다 문질러 시퍼렇게 멍든 팔뚝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가는 안 가는 못 가는 병원 복도 서성거리던 요셉 성인 손을 내밀다 오라고 어서 오라고 그 곳에 다 모여 있다고 돌아보다 자꾸 돌아보다 단단한 못 뺀 자리 온몸을 소스라치며 하염.. 2014. 7. 13. 봄날, 이성복 봄날 이성복 1 어떤 저녁은 식육식당 생철대문 앞 보도블록 사이에 하얗게 피어 있었다 나는 바람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저녁은 소스라치며 떨고 있었다 나는 또 스쳐가는 내 발걸음에 깨알 같은 그것들이 으스러지고 말 것 같아, 잠시 멈춰섰다 아무도 찾는 이 없고 아무도 전화하지 않는.. 2014. 6. 3.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정희성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정희성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어디 가 조용히 혼자 좀 있다 오고 싶어서 배낭 메고 나서는데 집사람이 어디 가느냐고 생태학교에 간다고 생태는 무슨 생태? 늙은이는 어디 가지도 말고 그냥 들어앉아 있는 게 생태라고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 2014. 5. 21. 토끼가 없어요 토끼가 없어요 스승을 뵙고 돌아오던 치악재 간이매점 위 커다란 황금빛 달이 떠올라 뒤뚱거리더니 면사무소 앞 들판에 풍덩 빠졌다 오월의 물 댄 빈 논 방금 개구리가 된 올챙이들이 앞다리 뒷다리 꼬무작거리며 개골 울다가 달이 빠진 논 속에서 토끼를 건져내었다 개구리 백 마리 토.. 2014. 5. 16. 미시령, 이상국 미시령 이상국 영을 넘으면 동해가 보이고 그 바닷가에 나의 옛집이 있다 나도 더러 대처에서 보란 듯이 살고 싶다 그러나 바다가 섭섭해 할까 봐 눈 오는 날에도 산을 넘고 어떤 날은 달밤에도 넘는다 속으로 서울 같은 건 복잡해서 거저 준대도 못 산다며 한사코 영을 넘는 것이다 바다.. 2014. 5. 11. 사흘 민박 , 이상국 사흘 민박 외 2편 이상국 무청을 엮던 주인이 굳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해서 시 만드는 사람이라고 일러주었으나 노는 가을 며칠을 거저 내주지는 않았다 세상의 시가 그러하듯 오늘도 나 같은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주인 내외는 근사하게 차려입고 읍내로 잔치 보러가고 나는 지게처럼 .. 2014. 5. 11. 이전 1 ··· 3 4 5 6 7 8 9 ··· 2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