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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시화전 물들다 김정희 안개가 자욱한 새벽, 얼어붙은 배추가 지상의 색깔을 빨아먹고 있다 나는 문득 배추를 뽑으려다 무채색으로 널브러진 가을을 본다 밭둑의 고얌나무 뒤에 숨어 회색으로 쏘아보던 새벽은 배추의 초록색으로 스며들고 한 면만 빨간 목장갑 낀 나의 손도 녹색에 젖는다 지상.. 2013. 8. 11.
안도현'시와 연애하는 법'-4 4.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의 결별 만약에 당신이 ‘가을’을 소재로 한 편의 시를 쓴다고 치자. 당신의 머릿속에 당장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가을의 목록은 십중팔구 ‘낙엽·코스모스·귀뚜라미·단풍잎·하늘·황금들녘·허수아비·추석’과 같은 말들일 것이다. 이런 말들이 당.. 2013. 8. 11.
바다에의 열병, 존 메이스필드 Sea Fever John Masefield (United Kingdom 1878~1967) I must go down to the seas again, to the lonely sea and the sky, And all I ask is a tall ship and a star to steer her by, And the wheel's kick and the wind's song and the white sail's shaking, And a gray mist on the sea's face and a gray dawn breaking. I must go down to the seas again, for the call of the running tide Is a wi.. 2013. 7. 31.
수세미 수세미 김 정희 늦은 여름 아침, 늙은 소처럼 마당을 어슬렁거리다 그 놈 물건처럼 축 늘어진 수세미를 보았는데 큼지막한 게 보기는 좋다만 개미가 바글대고, 거죽은 주글주글한 것이 꼭, 우리 망구 닮았구나. 내 심통 맞은 소리에 망구 볼따구 실룩이며 그 놈 두둑 따더니 햇살 먹어 늙.. 2013. 7. 24.
여름 여름 김정희 도로보다 낮은 집 자살한 여배우 살아 웃고 있는 신문지로 발라 놓은 쪽문 열고 할머니 달리는 버스를 멀건이 쳐다본다. 오토바이 하나 지나가고 자전거, 트럭 다시 버스 하나 정류장에 선다. 버스 창밖 멀건이 바라보던 나와 눈이 마주친다 할머니 히죽 웃는다. 이빨이 하나 .. 2013. 7. 7.
긁다 긁다 김정희 꿀벌이 무슨 작정으로 바닷가 모래 위에 앉았다가 맨발로 걷던 발에 밟히다. 평생을, 꽃만 먹더니 모래에도 꿀이 있었나. 발바닥에 꿀 독침 한번 쏘고 파도 속으로 스러지네. 독의 대가는 발바닥에 똬리를 틀고, 꿀벌이 어찌 알랴? 세상에 아픔보다 참지 못하는 것이 간지러운.. 2013. 6. 26.
갈매못 성지에서 갈매못 성지에서 김정희 바다가 보이는 갈매못 성지에서 순교한 이들의 믿음을 본다. 세상에 나와 목숨 쉬 내 주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손톱에 가시 하나 박혀도 엄살이 태산인 좁은 나에게 묻노니 그들의 삶을 통째 내 준 바닷가에서 머리카락 한 올도 아까워 버리지 못하는 너의.. 2013. 6. 6.
순례자의 잠, 한석호 순례자의 잠 한석호 시간은 저녁의 호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거운 신발을 벗는다. 거룩한 자여, 오월은 푸른 장미 향기로 그윽한가 길은 저만치 수구水口를 따라 휘어지고 있다 보리의 술렁임이 깊어질 때 일몰은 치맛자락을 끌고 내려오고 나는 물끄러미 강물에 발을 담근다 그러면 .. 2013. 5. 17.
생각 생각 김정희 밤 아홉 시에 대추나무에 앉아 뻐어꾹 우는 뻐꾸기 소리 듣고,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란 영화 때문에 애먼 뻐꾸기 마음대로 울지도 못한다고 혼자 웃었다. 뻐꾸기 한 번 울면 나는 한 번 웃고, 뻐꾸기 쉬었다 울면, 나도 쉬었다 웃고 댕그르르 달이 대추나무에 걸리자 나도 뻐.. 2013. 5.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