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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 시 오후 다섯 시 김 정희 할머니 허리 숙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오후 다섯 시. 하루 품 팔아 연명한다고 서럽게 생각 마시게. 내일 천 평 밭에 일 있다고 벌써 파발 받았다네. 아들 며느리 다 있어도 밥 한 끼 겨우 얻어먹는 윗동네 윤 씨랑은 애초에 틀린다오. 한 달에 벌이가 웬만한 사람보다는 날게.. 2009. 7. 12.
풍경소리 풍경소리 김 정희 개울 건너 솔숲에 혼자 사는 바람 밤마다 추녀 끝 풍경에게 놀러와 뎅그렁 뎅그렁 온 마당에 함박꽃잎 흩뜨려 놓았네. 풍경을 몰래 떼어 뒷마당 감나무 가지 끝에 달았더니 놀러 온 바람이 마당 한 바퀴 휘잉 돌고는 함박꽃 한 송이로 감나무를 홀려서는 풍경을 데리고 가버리고 없더.. 2009. 6. 29.
치악산 성황림 치악산 성황림 김정희 목단 붉은 잎사귀 한 잎 두 잎 열며, 어스름한 새벽하늘 한 켠 젖히고 해가 뜨는 치악산. 해는 상원사 범종을 울리고 남대봉 소나무에 걸터앉았네. 송화 가루 날리는 산길을 따라 쪽동백 수줍게 인사 하는 숲을 봐. 어수룩한 마음을 상원사 대웅전에 앉혀놓고, 몸은 성황림 고개 .. 2009. 6. 12.
누구든, 언제든. 누구든, 언제든. 김 정희 귀와 눈을 가린 채, 먼 길을 돌아 온 나그네 아직도 그 집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 집에 사는 이 누구던가? 내 어릴 적 오줌 싸고 키 덮어 쓴 채 소금 얻으러 갔을 때, 엉덩짝 때리며 한 줌 소금 주던 그 어르신 아니던가? 지금, 그 어른 어린애가 되어 기저귀 차고 뒷방에 갇.. 2009. 6. 3.
햇빛 이불 햇빛 이불 김 정희 한여름 땡볕 저수지 둑에 지글거릴 때, 잘 드는 가위로 싹둑 잘라다가 바느질 곱게 하는 누나에게 보내야지. 눈부시게 환한 햇빛 이불을 아무도 모르게 장롱 속에 감췄다가 북풍 몰아치는 눈 오는 겨울밤 아랫목에 활짝 펼쳐 놓고서 허리 아픈 울 엄마 덮어줘야지. 2009. 4. 29.
할머니의 이불 이불 김 정희 엄마는 매일 이불을 빤다. 할머니가 그려 놓은 지도를 지우신다. 오늘은 미국에 다녀오셨네. 엄마 웃으면서 이불 털어 너신다. 매일 빨아도 얼룩덜룩한 할머니 이불, 엄마도 늙으면 지도를 그리실까 나도 매일 엄마 이불을 빨아야 하나? 엄마가 그려 놓은 세계 지도를 보면서 웃으면서 나.. 2009. 4. 24.
봄 비 봄 비 김 정희 어두운 하늘이 마당에 내릴 때, 마당 한 구석 꽃밭에 마른 바람 한 번 휭 불면, 목 내밀다가 움츠리고, 철없는 꽃잎 피었다가 얼어붙어 가만히 있기도 하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꽃밭엔 꽃이 아직 없고, 손바닥보다 더 작은 마음은 심을 밭이 아직 없고, 꽃이 없는 꽃밭, 밭 없는 마음. 나무.. 2009. 4. 22.
검은 들판 검은 들판 김 정희 검은 뱀들이 들판에 모여 산다. 들판에서 동면해도 그들은 얼어 죽지 않는다. 검은 뱀들의 뱃속엔 흙이 몸을 웅크린 채, 하얗게 야윈 얼굴로 가끔 운다. 흙은 햇빛이 무슨 빛깔인지를 잊어버리고, 그저 오래 전 눈부심을 기억할 뿐이다. 봄이 오면 들판은 새로운 검은 뱀들로 가득하.. 2009. 4. 16.
오후 세 시 오후 세 시. 김 정희 햇빛이 한 자락씩 바스러지는 오후 세 시. 바스러진 조각들이 떨어진다. 떨어진 조각의 날카로운 칼날에 오후가 가슴을 베인다. 오후가 쓰러진다. 쓰러진 그를 밟고 어둠이 온다. 온 몸이 찢긴 채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때. 오후 세 시. 사람들의 아우성이 칼처럼 그를 향해 날아간다... 2009. 4. 7.